최근 일본 도호쿠(東北)대지진과 핵재앙의 공포라는 비현실적인 현실이 향후 한국 문학의 상상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최근 수년간 한국의 명민한 작가들을 휘어잡았던 것은 문명 파국을 예감케 하는 대재난과 재앙의 상상력이었던 까닭에서다. 시대 흐름에 예민한 작가들에게 그것은 닥쳐올 문명 파국에 대한 경고이거나 혹은 스스로가 먼저 앓는 문명적 질병의 징후이기도 했으며, 때로 폐쇄된 질서의 장막을 찢는 틈새이기도 했다. 물론 대재앙이 현실화하기 전까지는.
지난해만해도 재난의 상상력은 더욱 첨예해져 한국 문단은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이란 뛰어난 재난 소설을 얻는 성과도 거뒀다. 올해 문학동네의 2회 젊은작가상 대상 작품인 이 단편은 재개발 지역의 한 소년이 도시 전체를 쓸어가는 대홍수의 물살 속에서 기어이 홀로 살아남는 이야기로 질긴 생의 의지를 담은 작품. ‘물 속 골리앗’이란 제목 대로 대홍수는 타워 크레인으로 표상되는 ‘삽질 문명’ 을 쓸어가는 재난으로서, 현대의 개발 문명을 겨냥하고 있다. 대홍수라는 신화적 상상력이 동원했지만 생생한 재난 다큐멘타리를 보는 듯 작가 특유의 밀도 있는 현실 묘사력과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문장력이 압권이다.
독일에 체류 중인 중견 시인 허수경씨가 올 초에 낸 신작 시집 의 첫머리 시 ‘나의 도시’도 도시 문명을 쓸어가는 대홍수를 그린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스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물 위에 뜬 건 무의식뿐, 무의식뿐,/ 건덩거리는 입술을 위로 올리고 죽은 무의식뿐’ 시집은 고대근동고고학을 공부한 시인답게 문명사적 시각에서 연민을 잃은 현대 문명의 차가운 심장을 고발하는 한편, 문명의 끄트머리를 예감하는 애처로움과 쓸쓸함도 진득하다. 지난해 나온 김경욱의 단편‘소년은 늙지 않는다’는 도시 전체가 눈으로 뒤덮이는 상황을, 그리고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지상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올라 투명하게 증발하는 종말적 세계를 다룬다.
일찌감치 재난을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소재로 적극 활용해 온 대표적 작가라면 편혜영씨를 꼽을 수 있다. 2005년 나온 첫 소설집 의 표제작은 2003년 유행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에서 모티프를 딴 작품으로 역병이 창궐하는 도시를 기괴한 모습으로 연출한다. 쓰레기와 악취로 뒤덮인 도시에서 인간과 짐승의 경계마저 허물어져 주인공은 끝내 개구리로 역진화한다. 지난해 나온 장편 도 신종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특히 편씨 작품에는 구원의 실마리조차 없다는 점은 특기할 대목이다. 예컨대 ‘물 속 골리앗’에서 홀로 남은 소년이 ‘누군가, 올 것이다’며 중얼거리며 끝나,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편씨 작품에선 재난의 탈출구는 없으며 재난 자체가 되레 전복적 역할을 대행하는 모습이다. 이를 테면 현실이 일종의 매트릭스적 가상의 구조물이라면 재난의 순간이 그 견고한 막을 허무는 순간인 것이다. 최근 나온 편씨의 신작 소설집 에선 그러나 재난이 더 이상 일상에 어떤 충격이나 두려움, 틈새도 주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 이채롭다. 일상을 낯설게 보는 자극제로서 재난이라는 상상력의 유통기한이 다했다는 판단에서일까. 이 소설집에서 재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어제 오늘 내일의 모습이, 혹은 나와 너의 역할이 똑같이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이다.
이렇듯 재난의 상상력이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며 한국 문단의 한 지평을 열어 왔지만 이제 재난이 압도적 현실로 닥쳐왔다는 점에서 소설 속 재난의 위상은 더 이상 예전 같을 수는 없게 됐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씨는 “재난이 문명 비판의 추상적 알레고리로 제시돼 왔는데, 더 이상 재난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며 “재난을 전제한 상황에서 그 속에서 겪은 인간 삶 하나 하나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 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