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품이 나란히 걸렸다. 한 작품은 제주 출신 작가 강요배가 1948년 발생했던 제주 4ㆍ3사건을 바탕으로 그린 ‘한라산 자락 사람들’(1992) 이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과 달리 작품은 유독 밝은 표정이다. 사람들이 군인의 탄압을 피해 도착한 한라산 자락에는 초록 잔디가 깔려 있다. 저 멀리 구름 낀 한라산은 희뿌연 푸른색이다.
그 옆의 그림은 이쾌대(1912~53)의 ‘해방고지’(1948). 작품에는 죽은 듯한 남자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이가 있고, 머리를 감싸쥐고 엎드린 이도 보인다. 해방 이후 혼란했던 상황을 흙빛으로 그렸다. 색감 표정 분위기 등이 확연히 다른 두 작품을 통해 같은 시기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이 올해 첫 기획 전시로 마련한 ‘코리안 랩소디_역사와 기억의 몽타주’전은 이처럼 한국 미술사의 굵직한 작품과 역사를 읽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기획됐다. 출품작은 이쾌대 이육사 박생광 이인성 나혜석 김기창 김환기 장욱진 백남준 안창홍 등 근ㆍ현대 작가 64명의 작품 100여점. 구한말 조선의 정치상황을 그린 일본인의 우키요에(목판화), 사진 아카이브, 다큐멘터리도 소개됐다. 이들은 작품 제작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역사적 사건과 분위기에 맞춰 이미지를 병치, 대립해 과거와 현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시됐다. 두 공간으로 나눠진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일제 강점기와 6ㆍ25전쟁, 민족분단의 비극, 유신독재, 근대산업화 과정,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ㆍ현대사가 생생하게 읽힌다.
‘낯선 희망’을 주제로 1879년 개항 이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주로 다룬 작품들은 1층 블랙박스 전시장에 배치됐다. 안중식 채용신 나혜석 이응노 등 근대 작가의 작품과 함께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 명성황후 시해 등 역사적 사건과 소재를 다룬 현대 작가의 작품이 함께 전시돼 있다. 이 공간에는 또 일본인에 의해 왜곡된 역사적 풍경을 그린 우타카와 쿠니마츠(1855~1944)의 ‘조선사건왕성후궁도’(1882)등 평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우키요에 6점도 전시됐다. 이밖에 1920년대 신문에 실렸던 만평을 팝아트적으로 재현한 이동기의 ‘모던 걸’ ‘모던 보이’(1998)도 일제강점기에 나타났던 문화적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지하 1층 그라운드 전시장은 194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 꾸며졌다. 특히 조동환, 해준 부자(父子)의 ‘1937년에서 1974년까지’(2002~2010)는 실제 부자의 경험을 재현한 드로잉 설치 작업으로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되짚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1960년대 들어 국가 재건을 목표로 정부가 독려한 산업 현장의 역동성을 그린 이종상의 ‘작업’(1962)과 김철현의 ‘산업사진 프로젝트’(2000년대)도 함께 걸려 한국 사회의 산업화 한 단면을 잘 보여 준다. 1960, 70년대 한국의 행위예술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미술계의 변화도 ‘1960, 70년대 한국의 행위예술’ 다큐멘터리를 통해 감지된다. 또 거대한 매듭의 꼬임을 그린 한운성의 ‘매듭’(1987)과 신학철의 ‘한국근대사_종합’(1982, 83)이라는 작품도 시대를 초월해 한국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서도호의 ‘유니폼’(2006), 오형근의 ‘아줌마’(1997), 김기라의 ‘코카킬러’(2010)도 한국 사회의 특징을 잘 꼬집은 작품들이다.
전시는 최정화의 ‘블러드 다이아몬드’(2011년)로 마무리됐다. 가장 마지막에 전시된 이 작품은 인간의 욕망과 세속화, 화려한 자기치장을 의미하는 가짜 보석들이 검은 칠을 한 박스(블랙박스) 안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형상이다. 전시를 만끽한 관객은 이 작품을 통과해 나오면서 다시 역사 속의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된다.
이준 전시기획자는 “역사적 사실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작품과 현대 한국 사회를 증언하는 작품을 함께 보여 주면서 한국 역사를 하나의 이미지로 읽어 내고 싶었다”며 “한국 근ㆍ현대사에 녹아있는 민족 애환, 급속한 변화 등의 굴곡을 자유로운 서사적 형식으로 보여 주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6월 5일까지. (02)2014_6900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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