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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23> 제2의 야구인생, KBO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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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23> 제2의 야구인생, KBO 사무총장

입력
2011.03.20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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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3년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생판 모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해 왔던 야구였지만 사무총장은 해설위원 때와는 180도 다른 생활이었다.

숨돌릴 틈도 없는 바쁜 생활, 현안과 미래 계획 등 신경을 써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다. 돌아보면 KBO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던 3년이 10년쯤은 되는 것 같다.

내가 KBO 사무총장을 맡았을 때 주위에서는 건강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우려했다. 그때마다 나는 “일이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곤 했다.

사무총장이 된 직후 한 인터뷰에서 나는 “앞으로 야구 해설은 다시 안 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놓고 어떤 분들은 내가 야구 해설을 지겨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 천직인, 오늘날 나를 있게 해준 야구를 내가 어찌 지겨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인생의 절반을 야구 해설자로 살았고, 하일성이라는 이름도 야구 해설자로 얻은 것이다. 야구 해설을 지겨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당시 인터뷰에서 “해설을 안 하겠다”고 했던 것은 새로운 자리에 들어온 만큼 그 일에 전념하겠다는 의미였다. 해설자가 아닌 행정가로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내 의지의 표현일 뿐이었다.

사무총장이 된 뒤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입 조심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천성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격의 없는 대화를 즐긴다. 하지만 KBO 사무총장 때는 그게 불가능했다. 무슨 말만 하면 곧바로 기사화돼서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사무총장이 된 뒤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야구를 보는 눈이다. 쉽게 말해서 전처럼 홀가분하게 야구를 즐길 수 없었다. 해설자 시절에는 사실에 가까운 정확한 해설을 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사무총장이 되고 난 뒤에는 날씨 걱정, 관중 걱정, 경기 내용 걱정 등 외적인 부분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해설할 때는 승부에 초점을 맞췄다면, 사무총장 때는 흥행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같은 야구이지만 해설은 단순하다. 스케줄이 잡히면 내가 중계해야 할 경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사전에 공부하고, 현장에 일찍 나가 취재하면 됐다. 그러나 사무총장 입장에서는 하루 4경기에 모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솔직히 경기를 보는 재미는 없어졌다. 야구는 승부를 전제로 봐야 하는데 사무를 전제로 보니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2006년의 일이다. 대구구장에서 삼성-한화의 한국시리즈 2차전을 1시간 앞둔 오후 1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20분 만에 빗줄기는 폭우로 변했다.

KBO 직원들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입장권은 예매로 일찌감치 팔렸고 스탠드에는 비옷을 입은 관중이 들어찼다. 관중은 빨리 경기를 진행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다들 난감해했다.

나는 KBO 실무 직원들, 심판들과 대화를 나누며 경기 개시 여부를 두고 고심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인 만큼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웠다. 만일 취소된다면 관중의 반발도 우려됐고, 환불 절차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경기를 강행하자니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규정상 포스트시즌도 페넌트레이스와 똑같이 5회만 채운 뒤 강우콜드게임을 선언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그런 결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경기 시작 직전까지 고민하다가 오후 2시 이후부터 더 많은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취소를 결정했다. 이제 문제는 관중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관중석은 이미 다 차 있는 상황에서 취소를 발표했다가 어떤 반발을 살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고심 끝에 심판이 직접 나가 발표하기로 했다. 전광판 고지나 장내 아나운서의 설명보다 그게 더 효과적일 것 같다고 판단했다. 주심을 맡은 임채섭 심판은 홈 플레이트 뒤로 나가 마이크를 들고 관중 앞에 섰다. 유례없는 심판의 호소에 관중은 별 반발 없이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사무총장 재직 시절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2007년 여름에 있었던 심판 파동이었다. 심판들간 파벌이 조성되다 보니 집단행동으로 이어졌고, 보이콧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다.

시시비비를 떠나 모든 게 내가 부덕한 탓이었다. 인간적으로든 행정가로든 나의 역량과 지혜가 많이 부족했다고 깊이 반성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나는 많은 걸 배우고 깨닫게 됐다. 우리나라 스포츠선수들은 어려서부터 상대방은 무조건 무찔러야 한다고 배웠던 까닭에 부지불식간에 편가르기 의식이 만연해 있는 게 사실이다.

나는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끝으로 사무총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방송 해설위원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제11대 KBO 사무총장이고 선수 출신으로는 3번째다. 나는 임기가 끝난 뒤 “하일성이란 사람은 참 열심히 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만두는 날까지 스케줄을 들여다보면서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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