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사건 사고가 등장하지 않는다. 원제 'Another Year'(또 하나의 해)가 암시하듯 어느 해,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상이 129분을 채운다. 드라마틱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인데도 이 영화, 특별하다. 별스럽지 않은 인생들에 초점을 맞추며 인생에 대한 빼어난 통찰력을 발휘한다. 인간 감정의 본질을 조금씩 드러내는 이 영화는 꼭꼭 감춰 둔 속내를 오랜 친구에게 들킨 듯한 느낌을 준다.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즐기는 노부부 톰(짐 브로드벤트)과 제리(러스 쉰),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레슬리 맨빌)가 스크린 중심에 있다. 돈에 쪼들리고 남자친구도 없는 메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톰과 제리의 집을 종종 찾는다. 유쾌하고 따스한 부부는 메리를 격의 없이 대하며 슬픔과 고독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 어느 날 부부의 아들 조이(올리버 맬트먼)가 여자친구 케이트를 집에 데려 오는데 갑자기 찾아온 메리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면서 스크린에 파동이 인다.
영화는 사계를 빌려 우리의 삶을 은유 한다. 비루한 삶이지만 톰과 제리를 통해 희망을 품는 메리의 사연이 봄을 관통한다. 퇴직을 앞둔 톰의 친구 켄이 메리에게 품는 위태로운 연정, 조이에 대한 메리의 감정 등이 여름을 배경으로 이어진다. 메리가 감정을 들키게 되는 격정의 가을을 거쳐 가족의 울타리를 침범한 메리를 냉대하는 톰과 제리의 겨울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사계를 보내며 등장인물들이 일으키는 미세한 감정 변화를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포착하며 보는 이의 가슴에게까지 파장을 전달한다.
비 맞은 유기견과도 같은 메리의 예측불허 감정이 이 영화의 동력이다. 메리의 처지와 행동은 안쓰러움을 자아내면서도 쉬 끌어안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연민을 품다가도 자신의 삶과 직결되면 배척도 하기 마련인 인생사의 아이러니를 영화는 메리를 매개로 전한다. 동병상련해야 할 켄을 야멸차게 대하는 메리의 태도도 인간의 이중성을 대변한다.
비수와도 같은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가족 식사에 우연히 메리가 끼어들게 되자 톰과 제리는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다 메리의 감추고 싶은 청춘을 슬쩍 입에 올린다. 부부의 매정한 태도에 당황스러워하며 움츠러드는 메리의 모습이 참 씁쓸하고 쓸쓸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호평 받았으나 무관으로 물러났다. 레슬리 맨빌도 '시'(감독 이창동)의 윤정희, '증명서'(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줄리엣 비노쉬와 유력한 최우수여배우상 후보로 거론됐으나 영광은 비노쉬에게 돌아갔다. '비밀과 거짓말', '베라 드레이크' 등을 연출한 영국의 명장 마이크 리의 신작이다. 2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