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멍든 동심 달래고… 아동센터에 피어난 꿈
열 두 살 해진이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초등학교 3~4학년 시기를 학교에서 보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친구도 줄어들었다. 외로움이 커지면서 마음고생도 커졌다. 나중에는 바람 소리나 고양이 소리에도 놀라 몸을 떨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지역아동센터인 '나무를 심는 학교'에 들어오면서 해진이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많은 친구들이 생겼고, 선생님이 생겼다. 복학에 필요한 시험에도 열중할 수 있게 돼 평균 80점을 넘는 우수한 성적으로 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해진이는"학교를 마친 뒤에도 밤 늦게 까지 이 곳에서 좋은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고 놀 수 있게 돼 외롭지 않다"고 밝게 웃어 보였다.
지난 17일 오후 5시30분 서울 북아현동의 한 다세대 건물 2층에 자리잡은'나무를 심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해진이처럼 구김살이 없었다. 이 곳은 저소득가정 아이들을 맡아 돌보는 지역아동센터로, 삼성의 사회적 기업인 희망네크워크의 지원을 받고 있다. 센터의 성격이나 구성원들을 감안할 때 분위기가 다소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한 기자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40여명의 아이들은 교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즐겁게 어울리면서 결코 넓지 않은 34평의 공간을 활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센터 운영자인 고뢰자 센터장의 개인 사무실 문도 수시로 벌컥벌컥 열렸다. 아이들은 기자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음 놓고 센터장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송하경 희망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이처럼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지역아동센터가 좋은 곳"이라고 귀띔했다. 오후 6시 저녁 식사가 준비되자 아이들의 기분 좋은 웅성거림은 한층 더 커졌다.
이 곳이 이처럼 밝게 운영될 수 있었던 배경에 바로 희망네트워크가 있었다. 현재 지역아동센터에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월 340만~43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지만, 이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나무를 심는 학교의 경우 50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데 사용하는 비용은 월 1,500만원에 달한다. 이 때문에 정부 지원 외에 개인과 단체로부터 추가로 후원을 받아 겨우 살림을 꾸려왔다.
그런데 얼마 전 상당액을 지원하던 한 사회봉사단체에서 지원을 중단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해왔다. 그 때 희망네트워크가 이 센터를 다른 29개 센터들과 함께 운영 자금 및 각종 프로그램 지원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고 센터장은"폭탄을 맞은 기분이었다. 선물폭탄 말이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희망네트워크는 삼성이 지난 2월24일 설립한 삼성 최초의 사회적 기업이다. 하지만 이 기업의 근원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삼성은 '공부방'으로 불리던 시절의 지역아동센터 후원 운동인'희망의 공부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삼성은 이 운동을 통해 지난해까지 전국 4,560개 센터에 171억여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좀 더 체계적이고 영속 가능한 지원활동을 고민한 결과 올해 사단법인 형태의 사회적 기업 희망네트워크를 출범시켰다. 희망네크워크는 지역아동센터에 네 가지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먼저 맞벌이 부부 등을 위해 야간보호교사를 파견해 오후10시까지 아이들을 관리하게 하는 야간보호사업이 있다. 아이들의 인성 교육과 인문학적 소양 고취를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교재 등을 만들어 아이들을 교육하는 철학교실,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활동 장비와 교육을 지원하는 희망재능교실, 특별 관리가 필요한 아이들을 따로 돌보는 희망돌봄사업도 지원 대상이다. 희망네트워크는 일단 서울 지역 30개 지역아동센터를 대상으로 3년 동안 이 사업들을 지원하는데, 이에 드는 비용만 총 22억원에 이른다.
물론 돈 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송 사무국장은 "<산동네 공부방> 의 저자인 최수연씨는 저소득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가족 같은 관계를 요구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며 "희망네트워크도 아이들에게 가족 같은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동네>
박진석 기자 jseok@hk.co.kr
■ 정진규 희망네트워크 이사장
정진규(사진) 희망네크워크 이사장은"소외계층에 대한 봉사와 지원은 단순히 온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지지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강조했다. 19일 그가 대표변호사로 재직중인 서울 역삼동 법무법인 대륙아주 사무실에서 만난 정 이사장은 사회 전체, 특히 재력가나 대기업이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고검장 출신인 그는"검찰에 있을 때도 범죄자들이 정상적 사회 복귀 기회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법질서 바로 세우기의 궁극적 목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퇴직 후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국제연합봉사단 등 이런 저런 봉사활동에 많이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특히 사회 발전을 위해 일류 기업일 수록 봉사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며 "삼성의 희망네크워크가 그런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해 제의가 왔을 때 무보수 명예직이지만 기꺼이 맡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침 그의 아들과 며느리가 삼성에 재직중이라는 사실도 이사장직 수락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정 이사장은 희망네트워크의 지역아동센터 지원 활동과 관련해 "어려운 계층의 자녀일수록 방과 후 활동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희망네트워크의 지원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나는 이 사회에서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르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사회에 대대적인 봉사활동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 탈락자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이들이 빈곤계층으로 전락하게 되면 시스템에 불만을 갖게 되며 건전한 사회 발전을 저해하게 될 수도 있다"며"봉사활동은 단순히 온정주의나 휴머니즘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 기업들, 아동센터에 온정 손길
굳이 사회적기업의 모양새를 갖추지 않았더라도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기업들의 온정의 손길은 드물지 않다. 많은 기업들이 다양한 형태로 저소득층 아동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LG는 계열사별로 다양한 지원활동을 펴고 있다. LG화학 여수공장은 지난해부터 전남 여수시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중 11곳을 선별해 연간 1억원 상당을 지원하고 있다. TV 기증, 사물놀이 악기와 의상 제공 등 봉사활동의 형태도 다양하다. LG전자는 2009년부터 지역아동센터 아동들이 교육용 인터넷 콘텐츠를 TV로 내려받아 공부할 수 있도록 한'IPTV공부방'후원활동을 벌여왔다. LG연암문화재단은 지난해 9월 한국메세나협의회와 함께 지역아동센터 등 복지시설 6곳을 대상으로 예술교육을 진행한 뒤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현대차는 울산의 지역아동센터에서 매년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및 성탄절 선물 전달 등 내용의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낡은 센터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수해주는 집수리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KT도 활발한 지원활동을 펴고 있다. KT는 400여개의 '사랑의 봉사단'등이 지난해 9월 현재 450여개 지역아동센터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달 1회 이상 문화예술공연 관람, 체육활동, IT시설 견학 등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석채 KT 회장이 지난해 11월 경기 성남시 '즐거운 학교' 지역아동센터를 방문해 벽지를 새로 바르고, 미니 도서관을 건립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도 전국 60여개 지역아동센터에 'IPTV 공부방'을 순차적으로 개설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SK텔레콤 임직원들이 폐소재를 재활용해 친환경 옷과 가방 등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 '오르그닷'을 찾아 친환경 티셔츠를 직접 제작,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한화는 지난 연말 서울 은광지역아동센터 아동들과 함께 연극공연을 했다. 아동들은 서울 불광동 노인복지센터에서 5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초대해 연극 공연을 선보였다. 이들은 한화건설 임직원으로 구성된 한화봉사단으로부터 매달 연극지도를 받아왔다. 한화 호남지역봉사단은 전남 여수지역 아동센터 어린이들을 지리산으로 초청해 1박2일 동안 겨울 캠프를 진행했다.
재계 관계자는"사회봉사활동 중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지원활동이 유독 많은데 이는 그 만큼 저소득층 어린이들의 올바른 성장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라며 "이들이 올바르게 자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석 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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