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에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가 왜 없는 걸까.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인 한국에서 세계 정상은커녕 50위권 은행, 아니 아시아 챔피온 은행 하나 없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국내 은행들이 세계무대에서 선진국 은행들과 어깨를 겨루려면 대체 어디를 키우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 것일까.
현존 국내 시중은행들의 장점만 모아 놓은 '꿈의 은행'을 한 번 상상해보자. 국민은행의 넓고 안정적인 개인금융 기반에 우리은행의 대기업 금융, 기업은행의 중소기업 금융노하우를 접목시킨다. 여기에 신한은행의 탁월한 수익창출능력과 리스크관리 기법을 더하고 마지막으로 하나은행의 효율적 조직관리와 안정적 지배구조를 합쳐 놓는다. 이쯤 되면 외형과 내실을 두루 갖춘 그야말로 '드림뱅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만으론 2%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 국내 은행들이 진정 세계시장을 노크하려면, ▦이자에 한정된 수익구조 ▦'친절한 창구직원'에 머무는 고객서비스 ▦빈약한 해외영업기반 등 우리나라 은행 공통의 열성 DNA부터 떨쳐 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은행들이 추구해야 할 진짜 '드림뱅크'는 국내 5대 은행의 강점에 ▦JP모건체이스의 리스크관리 ▦산탄데르의 해외확장 ▦웰스파고의 고객 맞춤형 서비스능력까지 추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고객중심주의
미국 웰스파고 은행은 대표적 소매금융 전문은행이지만, 전체이익의 50% 이상이 비(非) 이자부문에서 나온다. 비결은 고객 1인당 5건 이상이나 되는 교차판매(보험 펀드 등 비은행 상품판매). 이는 우리나라 은행들처럼 무작정 '캠페인'식으로 상품판촉을 하는 게 아니라, 고객 특성을 정확하게 분석해 맞춤형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상업은행들의 고객중심주의는 특히 지역고객과 장기간 지속적 관계를 맺으면서 필요한 금융서비스를 알아서 제공하는 '관계형 금융'형태로도 나타난다. 스웨덴의 한델스은행은 지배구조부터 영업방식까지 철저한 지역밀착으로, 언제나 흑자를 내는 은행으로 유명하다. 독일 코메르쯔은행은 경기의 호ㆍ불황에 관계없이, 중견ㆍ중소기업과 장기간 고객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객과 오랜 관계가 축적되면, 기업의 내용을 자세히 알기 때문에 리스크를 사전에 인지할 가능성도 높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그런 고객중심주의는 없다. 한 시중은행 전직임원은 "솔직히 창구직원 친절도만 보면 우리나라 은행이 아마 세계 최고일 것"이라며 "하지만 상냥하게 웃는 것이 진정한 고객중심주의는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리스크 관리
해외 인수합병(M&A)으로 유명한 스페인 산탄데르은행은 CEO와 임직원을 현지에서 채용하는 등 철저히 현지화 전략을 택하고 있지만, 리스크관리만은 본사에서 직접 관리한다.
은행이 위기상황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를 점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는 우리나라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지나고서야 널리 소개된 개념이지만, JP모건체이스는 이미 1990년대부터 독자적으로 이를 시행해왔다. 이를 통해 JP모건체이스는 항상 예대율(예금액 대비 대출액 비율)을 75%이하로 유지하며, 위기대응능력을 키워왔다.
구정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위기 때 살아남은 은행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리스크관리위원회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점"이라며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리스크관리담당 임원이 부행장급으로 임기도 짧고 정식 등기이사도 아닐 뿐 아니라 이사회 내 리스크위원회의 구성원도 아닌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해외 진출
"우리나라 은행들이 나라밖에서 통할 수 있겠어?" 우리나라 은행들은 아직도 이런'해외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다 보니 영업대상을 해외동포나 해외진출 자국기업으로 국한하게 되고, 진출방식 역시 지점 또는 현지법인 설립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은행의 글로벌화 정도를 보여주는 '초국적화지수'는 2010년6월말 현재 2.9%에 불과한데, 영국계 HSBC는 무려 64.7%에 달한다.
하지만 글로벌 은행들은 대부분 M&A 방식을 택했다. 산탄데르은행은 영국의 4위 은행을 사들여 자신감을 얻은 뒤, 이후 언어가 같은 중남미 은행을 수십 개 인수하면서 세계 톱10은행으로 발돋움했다. 스웨덴 한델스은행은 유럽권, 싱가포르 DBS는 동남아권 등 언어나 문화가 유사한 인근 지역은행들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 중이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에서 자국동포 아닌 현지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면 새로 법인을 세우는 것 보다 현지 금융기관을 인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 BoA 뜨고 씨티 처지고…글로벌 뱅크 지각변동
지진은 언제나 기존 판도를 뒤바꿔 놓는 법. 글로벌 금융시장도 최근 2~3년 동안 전후(戰後) 최대의 지각변동을 겪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로 야기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세계 은행 권력의 지도를 한꺼번에 바꿔놓는 분수령이었다.
세계적 금융전문지 <뱅커> 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1,000대 은행(자기자본 기준)의 면면을 보면 우선 '씨티제국'의 쇠퇴가 확연히 읽힌다. 소매금융의 최강자로 지난 1999년부터 8년간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던 씨티그룹은 서프프라임모기지 여파로 2007년에 2위로 내려앉더니, 2009년과 2010년에는 아예 3위로 쳐졌다. 뱅커>
대신 치고 올라온 곳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JP모건체이스. BoA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쓰러진 대형투자은행(IB) 메릴린치를 인수하면서, 2009년 2위에 이어 지난해엔 1위에 등극했다. 역시 서브프라임 사태 와중에 베어스턴스와 워싱턴뮤추얼을 사들인 JP모건체이스 역시 2009년 1위에 오르더니, 지난해에는 2위로 BoA와 자리바꿈을 했다. 2008년 23위에 머물렀던 웰스파고 역시 와코비아은행을 전격 인수한 뒤, 단숨에 6위에 오르기도 했다.
BoA, JP모건체이스, 웰스파고 등은 한결같이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IB가 아니라 예금ㆍ대출업무를 기본으로 하는 상업은행(CB)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 세계은행권 지각변동의 첫 번째 키워드는 바로 'IB시대는 폐막, CB전성시대의 도래'인 셈이다.
또 하나 특징은 비(非)미국계 은행들의 약진. 중국 공상은행이 2008년 처음으로 톱 10에 진입한 후 지난해 7위까지 올랐다. 아직 금융기법은 취약하지만, 적어도 규모로는 중국계 금융사들이 세계정상권에 이름을 올릴 날도 멀지 않았다는 평가다. 반면 한때 세계 최대은행을 넘봤던 일본 미쓰비시 UFJ는 지난해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비 미국계인 스페인 산탄데르은행도 승승장구중이다. 특유의 지역밀착 소매영업과 지속적 인수합병(M&A)전략으로 글로벌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산탄데르은행은 2006년 처음 톱10에 처음으로 진입한 후 돌풍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 기업銀 약진, 하나銀 전진 국내 은행 판세도 꿈틀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내은행 판세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몰고 왔다. 국민, 우리, 신한, 하나, 기업 등 5대 은행들은 현재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없는 거친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선두주자와 후발주자의 간극은 점점 더 좁혀지고 있다.
일단 글로벌 위기 이전만해도 은행 판도는 국민 우리 신한 하나의 4강 구도. 그 중에서도 '거함' 국민과 '실속' 신한이 좀 더 돋보였다. 금융위기 와중에 가장 약진한 곳은 기업은행. 다른 은행들이 움츠린 사이 중소기업 대출자산을 대폭 늘리면서, 단숨에 국내 은행판도를 4강 구도에서 5강구도 바꿔 놓았다.
또 하나의 반전드라마는 하나은행이 썼다. 국민 우리 신한 등 선두주자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기업은행으로부터는 턱밑까지 추격을 받는 상황이 됐지만 외환은행 인수를 통해 역전 홈런을 날렸다. 아직 인수절차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은행은 단번에 4강 탈락 위험을 벗어나, 최정상의 자리를 노크하게 됐다.
대신 국민 우리 신한 등은 이제 추격을 받는 위치가 됐다. 특히 국민은행은 규모와 네트워크 면에서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수익성 악화로 '리딩 뱅크'의 명성이 흔들리는 상황. 하지만 국민은행측은 인원감축과 카드분사, 대기업영업확대 등 '워밍업'이 끝난 만큼, "승부는 지금부터"라고 자신감을 표시하고 있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외형과 수익 두 마리 토끼몰이에 성공한 모습. 하지만 민영화(우리), 새 리더십 안착(신한) 등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다, 타 은행들의 추격이 워낙 거세 수성(守城)을 낙관하기는 힘든 양상이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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