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사람은 다 별 달았지. 건희는 임마, 별이 세개야."
서울 대학로 아트윈시어터에서 공연중인 연극 '늘근 도둑이야기'의 대사 한 토막. 권세가의 부인이 주인인 미술관을 털러 온 좀도둑 더늘근이 덜늘근에게 내뱉는 저 대사에 관객들은 배꼽을 잡는다. 이 오래된 연극의 객석 20% 이상은 40대 이상이 꾸준히 차지하고 있다.
1989년 처음 막을 올린 이 작품은 '높으신 그분'의 집에 잠입한 좀도둑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 당시 권력을 풍자했던 코미디물로 1996, 1997, 2003, 2008년에 이어 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지난 9일 공연을 관람한 김모(49)씨는 "배경이나 음악이 우리 세대에 맞아 좋았다"며 "매달 한번씩 직장 동료들과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데 40~50대 취향의 공연이 꾸준히 늘고 있어 반갑다"고 말했다.
세시봉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 공연 관객의 80%를 차지하는 20~30대 여성의 틈바구니를 뚫고 중장년 취향의 복고 공연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옛 노래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도 재공연되거나 새롭게 창작된다. 한국 문화생태계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복고 바람 거센 음악 콘서트
복고 바람이 가장 크게 일고 있는 공연 장르는 음악 콘서트다. 세시봉을 필두로 중장년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악 콘서트의 인기는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온라인 공연티켓 판매사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콘서트'세시봉 친구들'의 경우 40대 이상이 전체 예매자의 3분의 1(29.4%)에 이르고, 30대 관객이 43.3%로 가장 많다.
지난달 에릭 클랩튼 공연은 30~40대 이상 관객이 전체 관객의 70% 이상을 차지했고 3일 산타나 공연은 관람객의 48.5%가 40대 이상이었다. 19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메탈 밴드 '아이언 메이든'의 10일 내한 공연 역시 40대 예매자가 26.9%에 달했고, 14일 이글스 공연은 40대 이상 예매자가 무려 55.8%나 된다
이 같은 경향은 세시봉 붐과 무관하게 최근 몇 년 간 이어져왔다. 지난해만 해도 70~80년대를 주름잡던 음악가의 내한공연이 줄을 이었고 중장년의 호응도 뜨거웠다. 지난해 7월 스티비 원더 공연은 온라인 예매를 시작한 지 5분만에 전석 매진됐고, 기타리스트 제프 벡, 포크ㆍ저항음악의 상징인 밥 딜런의 내한도 화제가 됐다. 게리 무어와 레이프 가렛, 딥퍼플, 건즈앤로지스 등 노장 뮤지션들의 내한에 따른 중장년 관객에 힘입어 지난해 음악 콘서트 시장은 전년대비 41% 성장했다.
10년 된 맘마미아 다시 정기공연
가장 유망한 공연 장르로 떠오르고 있는 뮤지컬 시장에서도 복고바람이 뜨겁다.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등을 히트시키고 1971년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가수 배호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 음악극 '천변 카바레'는 지난해 11~12월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소극장(130석) 공연 전회 매진 기록을 세웠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관객의 40%가 넘었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이 극은 22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재공연한다.
2005년 한국 초연해 지난해 전국 순회공연을 마친 '메노포즈'는 지난달부터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되고 있는데 40대 이상 예매자가 전체의 27.9%다. 이 극에는 가수 혜은이(한물 간 연속극 배우 역), 뮤지컬 전문배우 홍지민, 개그맨 이영자 김숙 등이 출연해 'YMCA'등의 70~80년대 노래와 이야기로 폐경기 갱년기를 이야기 한다.
'맘마미아' 역시 10년 된 라이선스 뮤지컬로서 한계를 안고 있지만 중년 여성 관객들의 호응이 식지 않고 있다. 80년대를 풍미한 그룹 아바의 노래에 바탕을 둔 이 극은 올 들어 25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지방순회공연 객석점유율이 85% 이상을 기록했다.
3월 충남 천안시청 공연은 예매자의 32.1%가 40대였지만 실제 객석 대부분은 자녀 등이 사준 표를 들고 입장한 중장년층 여성이 메우고 있다. '맘마미아'는 오는 8월께 서울 신도림에서 문을 여는 디큐브시어터 개관작으로 다시 막을 올려 연속 공연에 돌입한다.
1994년 초연돼 2008년 400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멈췄던 독일 원작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아듀 시즌' 공연도 연일 매진행진이다. 극단 학전은 20주년을 기념해 이 달 10~20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에서 원래 150분에서 80분 분량으로 압축한 다이제스트 버전 '지하철 1호선'을 '고추장 떡볶이' 등 레퍼토리 공연과 함께 펼치고 있다.
80년대를 풍미한 작곡가 故 이영훈의 노래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광화문연가'등을 사용한 뮤지컬 '광화문 연가'도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한다.
복고 공연의 활성화 배경은
복고 공연이 활성화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상업성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중장년층 관객들이 자신들의 문화 소비에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인기 공연의 경우 재관람율도 높다. 신시뮤지컬컴퍼니 관계자는 "뮤지컬'맘마미아'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 총 853회 공연됐고 120만여 명이 관람했는데 이 인원 가운데 상당수는 두 번 세 번 본 경우"라고 말했다. 2001년 서울 강남구에 LG아트센터가 처음 생겼을 때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중년층 관객을 기반으로 이내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런 흐름에 힘입은 결과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중장년층의 티켓파워는 아직 미미한 것도 사실이다. 공연계 티켓구매의 과반수는 여전히 20~30대 여성이다. 그 때문에 중장년층을 노린 복고풍 공연 시장 확대가 사회적 문화다양성 확대에 기여할 수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이승엽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실버층이 두터워지는 사회경제적 현상이 문화다양성 확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복고 열풍, 디지털 시대의 반동인가…
인류 문화사가 그 자체로 거대한 복고의 역사라 할 수는 없을까. 모든 새로운 것은 늘 낡은 것에서 태어나니까. 중세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신고전주의-포스터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문화 지성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는 "하지만 그 같은 일반적이고 시대적인 현상과 달리 특정 시기의 패션이나 유행을 거의 동일하게 모방하는 것은 복고적 풍의 유행(fad)이나 복고 모드(mode)라 규정해야 할 것"이라며 "최근의 세시봉 열풍도 70년대의 펑크모드 재현이나 80년대 뉴웨이브 모방처럼 일시적 유행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식 인하대 교수도 '유행은 근대의 현상'이라는 아날학파 역사학자 브로델의 말을 인용하며 복고성의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스타일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하지만 대도시와 대중문화가 출현하면서 절대 다수의 공조현상, 곧 유행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복고
김동식 교수는 디지털 문명 자체가 끊임없이 복고를 요청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모든 문화 컨텐츠를 0, 1의 숫자로 전환하고 하이퍼링크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명을 소환(복고)할 수밖에 없다"며 "최근 경향도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 체화하지 못했거나 배제ㆍ망각된 경험들에 대한 계몽의 복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문학전집이 끊임없이 재출간되고, 유년기에 그림책으로 읽은 를 40,50대가 정본으로 다시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동연 교수는 김 교수와는 디지털시대의 복고 경향을 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 기제로 설명했다. 그는 "급격한 시대 변화나 테크놀러지의 진화가 생길 때마다 이에 대한 심리적 저항으로 옛 것을 찾는다"며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워 과거를 그리워하는 퇴행적 감성(향수)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시봉 열풍의 맥락과 배경
이들은 세시봉 열풍을 주류 아이돌문화에 대한 피로에 따른 70년대 주류문화의 반작용으로도 해석했다. 김 교수는 "세시봉으로 대변되는 통기타세대는 전후세대와 달리 70년대 초반 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대중문화를 향유한 사실상 첫 세대"라며 "천편일률적인 아이돌문화와 대중매체가 공급하는 획일적 아이템에 싫증 난 상태에서 소수의 기억과 애정에 의존해온 그들의 문화가 현상의 전면에 등장했으니 폭발력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최근의 복고가 과거의 소비주의적 경향과는 다르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최근의 복고는 압축성장의 주도세력인 50,60대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들이 일궜던 근대 모더니티 문화를 복원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며 "성장주의의 단맛이 남아있던 때는 과거를 되돌아볼 이유도 여유도 없었으나 1990년대 말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쓰디쓴 현실과 새롭게 부딪치게 되고 그 갈증을 문화적으로 풀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복고 분위기의 전면화는 과거와 달리 현재성과 구체성에 의해 뒷받침되는 실체적 변화의 징후라고 말했다.
근원 동력은 재발견이 아니라 재창조
하지만 최근 경향이 대중문화의 지속적 흐름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건강한 방향성과 근원적 동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우세했다. 김 교수는 "90년대 너바나나 에릭 클랩튼이 강한 비트의 전자음악을 통기타 버전으로 편곡해 여러 명반을 남기며 90년대 MTV 언플러그드의 열풍을 이끈 것처럼 세시봉이 한 때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새롭고 근원적인 동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택광 교수는 세시봉 문화를 아이돌 문화의 대항문화로 이해하는 데 대해 우려하며 "그건 음악성이나 가창력, 문화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댄스냐 발라드냐라는 장르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시봉 시절에도 클래식을 즐기던 고급 문화층이 있었고, 그들은 대중문화의 주류였다"며 "'꼰대스러움'을 강조하기보다는 전 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컨텐츠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장르와 취향의 강조나 재발견이 아니라 현대성의 재창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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