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요시로(森喜朗ㆍ2000년4월~2001년4월) 전 총리는 재임 당시 '신기루 총리'로 불렸다. 그의 이름을 한자음으로 그대로 읽으면 '신키로'가 되어 '신기루(蜃氣樓)'와 같았던 데서 나온 풍자다.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 신기루라면, 이는 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대지진의 혼돈 속에서 오늘날 일본 정치 지도자에게 '과감한 결단'의 지도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신기루와 같다.
그 이유는 첫째, 세상의 변화로 지도력(리더십)의 개념과 내용이 크게 바뀌어 꼭 일본이 아니더라도 전통적 리더십의 중요성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독 위기 상황에서는 과거형 지도력에 대한 희구가 두드러져 현실과의 괴리를 낳는다. 리더십의 가장 오랜 개념은 지도자가 앞장 서서 명령하고, 통제하는 형태다. 이런 리더십 논의가 자취를 감춘 이후 한동안 무성했던 '카리스마형' 지도력에 대한 관심도 오래 전에 식었다.
대신에 현재 주로 거론되는 리더십은 공동 목표를 향한 구성원들의 효율적 노력을 끌어낼 영향력과 동기부여, 동원능력의 발휘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지도자 한 사람의 구심력보다 공유ㆍ분점의 리더십(Shared Leadership)이 활발히 거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성원의 집합적 행동양식의 변화, 즉 조직문화의 변혁을 이끄는 '변화의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도 자주 거론되는데, 일부 과거형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작용하고 있다.
둘째로, 일본 정치제도와 문화가 위기상황의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일본은 천황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삼고, 권력구조로 의원내각제를 택했다. 국회의 의석분포에 전적으로 의존해 선출되는 총리의 권위가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과 비교가 되지 않는 데다 집권 여당 내 파벌에 의한 권력분점의 결과 사실상 '임시직'이다.
물론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ㆍ1964년11월~72년7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ㆍ72년7월~74년12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ㆍ82년11월~87년11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ㆍ01년4월~03년11월) 전 총리 등의 예외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외다. 가령 사토 전 총리의 리더십은 패전으로 전체주의적 리더십이 소멸하고 민주적 리더십은 미처 자리잡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과 일본 국민의 '권위로의 도피'가 결합한 결과였다. 본격적 파벌 분화가 시작되기 전에 집권당에 대한 압도적 지배력, '개발독재'를 연상시키는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도 긍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집권당 내부에 대한 그의 지배력은 후계자인 다나카 전 총리에 그대로 이어질 정도로 강력했다.
거꾸로 나카소네 전 총리는 집권 자민당 내 파벌 간 세력균형이 빚은 '권력 공백'과 '대안 부재'를 역설적으로 지도력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의 퇴진 이후 전통적 파벌의 힘에 의존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ㆍ87년11월~89년6월) 전 총리의 권위가 한동안 두드러졌으나 잇따른 비리 사건으로 퇴진한 후 파벌정치 전통의 지도력은 더는 설 자리가 없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런 지도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개성과 구조개혁 의지로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대중적 정서에 호소하는 '극장형 정치'는 이내 수명을 다했다.
민주당 소수파 출신인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현실의 힘에서 비롯한 지도력과는 애초에 무관했다. 최대 파벌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대표 세력과의 갈등으로 자리가 위태롭고, 최근 재일동포 헌금 사건으로 도덕성도 금이 갔다. 남은 것은 합리적 선택과 판단뿐인데, 이는 관료사회나 준공공기업의 성실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하부구조에 구멍이 생겨 지도력 부재상황을 맞게 된 것은 불행이다. 다만 적절한 조치로 원전 위기를 타개할 수만 있다면, 일본 최초로 '합리적 지도력'이 실현되는 기회가 지금일 수도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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