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안기부 X파일’의 내용을 보도한 언론인들에게 유죄가 확정됐다. 통신비밀 보호와 언론의 자유가 충돌할 때 이를 조정하는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의 첫 판결인데, 이 사건 보도의 경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17일 안기부 X파일을 보도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상호 MBC 기자와 김연광 전 월간조선 편집장(현 대통령실 정무1비서관)에게 징역 6월 및 자격정지 1년의 형을 선고유예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 기자가 국가기관의 불법 감청 고발을 위해 불가피하게 대화 내용을 공개한 게 아니고, 문제의 대화는 보도 시점보다 8년 전이었다는 점에서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라 할 수도 없었다”며 “도청 자료 입수과정에서 사례비를 지급했고, 대화 당사자의 실명을 그대로 공개하는 등 방법의 상당성도 결여됐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안기부 X파일 내용을 전문 게재한 김 전 편집장에 대해서도 “자료의 취득 과정, 보도 방법 등이 정당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판결에 앞서 언론사의 불법 감청ㆍ녹음 내용 보도가 정당행위가 되기 위한 4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불법 감청ㆍ녹음 자체의 고발이라는 보도 목적이 있거나, 비보도 시 공중의 생명 신체 재산 등 공익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뚜렷해야 하고 ▦불법 감청 결과물 입수 과정에서 위법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적극적 관여를 해선 안 되며 ▦통신비밀 침해를 최소화해야 하고 ▦보도로 얻는 이익이 통신비밀 보호의 이익보다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죄 취지의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도 5명에 달해 논란의 불씨는 남게 됐다.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이인복 대법관은 “도청 자료의 대화 내용은 여야 대통령 후보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 정치인 및 검찰 고위관계자에 대한 추석 떡값 지급 등으로, 이는 불법을 통해 대선과 검찰조직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행태”라며 “민주적 헌정 질서의 근간을 해치는, 매우 중대한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라고 밝혔다. 5명의 대법관은 실명 공개에 대해서도 “대화 당사자들이 공적 인물인 점을 고려하면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이 기자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1997년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나눈 대화를 불법 감청한 파일을 입수해 2005년 7월 보도한 혐의로, 김 전 편집장은 이와 별도로 녹취록 전문을 기사화한 혐의로 2006년 기소됐다. 1심은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한 정당한 보도”라며 이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김 전 편집장에겐 유죄를 선고했으나, 2심은 “도청된 자료임을 알고도 실명 공개하는 등 수단과 방법의 상당성을 크게 벗어났다”며 2명 모두 유죄 판결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