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학이나 그림에는 국쇠 소리가 없어요. 국쇠 소리는 무쇠로 된 솥이 시뻘겋게 달구어졌을 때 쩍 하면서 스스로 갈라지는 소리야. 그게 뭐냐면, 이 자본주의 문명의 어둠을 갈라뜨리는 소리예요. 그게 없어요.”
요즘 문학 예술을 바라보는 백기완(79)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일갈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매가리가 없다는 소리다. 백 소장을 주축으로 한 진보 인사들이 지지부진한 문학 예술 판을 들썩여보자며 벽시(壁詩) 운동에 나섰다. 공동체의 염원과 아우성을 담는 새로운 장을 만들어 사회 변화의 불쏘시개로 만들겠다는 민중 문화운동의 일환이다.
첫 출발점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 통일문제연구소 담벼락. 16일 담쟁이 덩굴이 가득한 벽을 낀 아담한 골목길에 백 소장을 비롯한 20여명이 모여 첫 벽시 개막식을 가졌다. 이날 참석자들은 시인 신경림 홍일선 임동확 송경동씨, 민중미술 화가 신학철 임옥상씨,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김세균 서울대 교수,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이대로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이학영 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한도숙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이기연 우리옷 문화운동가 등으로 백 소장이 진보 진영의 씽크탱크로 제안한 노나메기재단 설립을 추진중인 인사들이다. 이들은 5월 노나메기재단 설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문화 학술운동에 나설 계획인데, 벽시 운동은 그 첫 발걸음이다. “공동체의 아픔과 함께 하는 연대의 문학, 인간의 존엄과 위엄을 찾아가는 용기 있는 문학을 확대시키겠다”는 취지다.
강화 유리의 벽판 위에 쓰여진 시는 이수호 전 위원장이 쓴 ‘다시 벽 앞에서’. ‘슬픔이더냐/ 네게 기대어 한없이 울리라/ 그리움이더냐/ 너를 부둥켜 안고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리라/...’재단설립추진위 측은 이곳 벽판에 매주 한 차례씩 시를 바꿔서 게재하는 한편 인터넷 홈페이지와 카페 등을 통해 벽시를 공모할 계획이다.
노나메기 벽시운동 모임 대표를 맡은 이수호 전 위원장은 “노동조합을 통해 전국 곳곳의 공장에도 벽시 공간을 확대시켜 나가고 연말에는 벽시 모음집도 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벽시 편집동인에는 이수호 도종환 이학영 송경동 임동확씨 등이 참여한다.
백 소장은 “젊을 때부터 벽시 운동을 제안했고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벽시를 연구소 앞에 내걸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며 “후배들이 다시 벽시 운동을 해보겠다고 하는데, 이번에 많은 이들이 동참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경림 시인도 “지금 한국의 시인들은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시를 쓰고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시가 문단에서 인정 받는 현실이다”며 “우리말에 책임져야 하는 시인들이 되레 우리말을 훼손하는 상황인데, 벽시 운동이 이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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