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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8> '열린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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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8> '열린 집에서'

입력
2011.03.1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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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아래채가 따로 있다. 워낙은 본채의 담 아래의 뜰에 딴채가 있었는데 그건 안채와 바깥채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워낙 묵고 낡은 탓에 안채는 헐리고 바깥채만 남았는데, 그게 지금 우리 집 아래채 노릇을 하고 있다. 식구끼리는 그냥 황토방이라 부른다. 이 별채를 본채 바로 옆의 '우리 별장'이라고 뻐기고 '우리네 별저(別邸)'라고 목에 힘주지 말라는 법은 없다.

겉모습은 경남지방의 민초들의 민가 그대로다. 그래서 벽돌집 이층인 본채와는 다른 격조를 지니고 있다. 집 모양새가 흙 바닥에 수더분하게 퍼질러 앉아 있는 느낌을 풍긴다. 질박하고 조촐한 만큼 안존하고 다소곳하다. 한쪽 세워서 괸 무릎 위에 깍지 낀 두 손 얹은 채로 점잖게 앉은 시골 할머니처럼 포근하다. 무릇 집이란 이토록 포근해야 한다. 안방 아랫목에 깔린 이불 같아야 한다. 거기 앉거나 누우면 눈에 안 보이는 화톳불이며 잉걸불의 온기가 은근하게 끼쳐져야 한다. 그게 집이다.

아래채를 옆에서 보면 삼간 '맞고리 집'이란 걸 단 숨, 아닌 단 눈에 알아보게 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초가삼간이 아닌 게 안쓰럽다. 본시는 초가지붕이었는데 볏짚 이엉을 해마다 갈아 얹기가 워낙 힘겨워서 그만 기와로 갈아 얹고 말았다. 베 옷 입고는 헬멧 쓴 꼴이라 보기가 민망할 때가 있지만 못 본 척한다.

성형수술 한다는 게 장애인 아닌 '장애 집'을 만들고 만 꼴이다. 언제든 솜씨를 발휘해서 복원 수술을 할 거라고 속으로 다짐은 두고 또 두고 하지만, 글쎄 큰 소리 어울리지 않을 돌팔이 의사 꼴로는 기약하기 난감하다.

'기와 삼간', 아무래도 집 같지 않기는커녕 말 같지도 않다. 그렇게 소리 내다 보면 영락없이 혀가 비트적댄다.

'초가삼간!'

그래야 고향 집 맛이 제대로 난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은 기와 삼간이 이나마 흙 집인 걸 천복과 천행으로 여기고 살 수 밖에. 삼간 맞고리 집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아 올린 축담 위에 세 칸을 지르고는 윗방과 아랫방, 또는 큰방과 건너 방 사이에 '정지 방', 이를테면 부엌 칸을 넣은 집이다.

큰 방의 앞은 명색이나마 대청마루다. 벌렁 드러누워서 크게 기지개를 켜면 발끝은 하늘을 내지른다. 손끝은 애꾸지게 장지문에 구멍을 낸다. '아, 편해!'

우지직! 생나무 마룻바닥이 꼼지락대면서 간질간질 등줄기를 매만진다. 늦가을 햇살 쐬면서 낮잠 자면 꿈이 벼이삭처럼 황금빛으로 익는다. 대청마루 없는 집이라니, 그게 무슨 집이라고! 마루 없는 집에 사는 것은 깃이랑 자락이랑 모조리 잘라내고는 겨우 달랑하니 허리와 가슴만 가리기 고작인 옷 걸치고 나다니는 꼴이 아닌지 모르겠다.

한데 우리에겐 또 다른 마루가 있다. 건너 방에 붙은 툇마루다. 엉덩이 대고 앉기도 모자랄 만큼 좁아서 마루라곤 겨우 체면치레를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거긴 곧잘 그림자가 끼곤 하기에 여름 뙤약볕을 약 올리기 좋은 곳! 잠시 잠깐의 피서지로는 남극대륙 저리 가라다. 간신간신 겨우 옆으로 몸을 뉘면, 처마 끝까지 억척스레 달려든 햇살이 도깨비처럼 불기운을 돋우고 악을 쓰지만 마루는 용케 비껴간다. 툇마루 없는 집, 그건 뒤꿈치가 잘려 나간 발 같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

대청과 툇마루 붙은 채로 우리 집 별채는 삼간이다. 삼간은 한국인의 집채 구조의 기본이다. 상 중 하, 좌 중 우, 대 중 소 등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많은 것에 세 칸 지르고는 살아 왔다. 뿐만 아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지하, 그렇게 지구에도 세 칸이 질러져 있다. 지구도 삼간 집이다. 작게는 짚신도 세코 짚신이고 떡에서도 셋붙이가 돋보인다. 셋은 숫자 중에서도 단연 세를 부리고 세도를 크게 부린다. 그러기에 우리 아래채의 세 칸의 세(勢)는 여간 아니다. 비 소리에 즐겨 장단 맞추고 웬만한 된바람이 설쳐도 여름 더위 식히는 부채질처럼 반긴다.

삼간을 고루 덮은 지붕은 학이 날 개를 살그머니 펴다 말고는 주춤대는 시늉이다. 아니, 집 아랫도리를 둥지 삼고는 병아리 새들을 품고 앉은 학의 날개 맵시 같다. 그 아래 세 칸 중에서도 부엌 칸은 별다르게 널따랗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삼간 전체가 한 겨울에도 훈기에 서려 있기 마련이다. 아궁이에 얹힌 무쇠 솥은 불기 없이도 물 끓는 기척을 풍기고 있다.

아궁이를 에워싸다시피 하고 있는 칸막이 벽을 거멓게 물들이고 있는 연기 자국도 보기만으로도 곰살궂게 따뜻하다. 마른 솔가지며 오리나무 등걸 그리고 목둣개비 따위, 땔감이 차곡차곡 싸인 안쪽에는 타작하고 남은 빈 깍지와 빈 이삭 그리고 마른 줄기 따위 쏘시개가 수북하다. 보기만 해도 바로 아궁이 불 쬐고 앉은 기분이 든다.

집은 이처럼 안보다 먼저 외관부터 다스해야 한다. 침입자가 아니고는 누구든 반기는 시늉이 아롱져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들고양이 보고도 "그래 어서 와!"하는 소리를 건넬 정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 아래채의 구조에서 깎아지른 직선은 드물다. 네 귀퉁이의 외곽선 말고는 차렷 자세 취한 병졸의 등줄기 같은 건 없다. 흙벽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조차도 조금은 구붓하게 허리 굽히고 섰다.

이따금 찾아 드는 손님들을 주인보다 먼저 반기자는 그 겸허한 자세! 밑을 바치고 있는 주춧돌도 다소곳하기는 마찬가지다. 둥글다 말고 모나다 만 그 맵시는 까탈을 피우는 법이 없다. 집은 그렇게 언제든 누구든 손님 맞이할 차비를 갖춘 터전이라야 한다. 소리 없이 "어서 오셔요"라고 말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집 대청과 툇마루는 언제나 열려진 공간이다. 군불만 때는 부엌에는 아예 문이 없다. 윗방, 아랫방 두 방의 장지문은 이름만 문이지, 가볍게 밀기만 해도 쉽게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러니 마음엔들 무슨 가림이며 거침이 있을라고!

뒷산 쳐다보면, 산바람이 되고 앞 바다 바라보면 해풍이 되는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집, 그게 우리 집이다. 우리 집 별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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