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과 해일이 빚은 엄청난 참화 속에서 일본 국민들이 보여준 차분하고 질서 있는 행동양식이 세계적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런 놀라움의 단적인 예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언급한 '인류 정신의 진화'다.
일본인들이 극한적 상황에서 고도의 자기절제를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반복적 교육ㆍ훈련과 더불어 일본 사회가 산업사회를 거치면서도 지켜온 전통적 문화요인을 든다. 교육훈련이 궁극적으로 특정 행동양식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겨냥하고, 문화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태도와 가치, 습관을 가리킨다면 둘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어떤 교육도 걸맞은 문화적 토양 없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어렵고, 문화 또한 교육에 따른 행동양식의 변화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주로 지진에 대비한 행동요령을 가르치는 일본의 '피난훈련'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솜을 누벼 넣은, 머리와 목덜미 아래까지 덮는 피난모자를 쓰고 아이들이 줄지어 운동장으로 이동하거나 안전모를 쓰고 책상 밑에 숨는 훈련이다. 그런 반복적 훈련이 재해시의 질서있는 행동양식을 다듬는데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거 우리 학생들이 예외 없이 거쳤던 교련교육이 그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보아 교육훈련 자체의 효과는 크게 여기기 어렵다. 오히려 일본의 교육과 문화를 관통하는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궁금증을 푸는 데 낫다.
그런 핵심 코드가 바로 '메이와쿠(迷惑)'다. '메이와쿠'는 우리말로 '폐'라고 옮길 수 있다. 가정과 학교, 사회교육을 통해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메이와쿠를 피하라', 즉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가령 길 가다가 남과 어깨를 부딪치거나 전철에서 좁은 자리를 비집고 앉는 바람에 옆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 모두가 메이와쿠다. 이 전통적 가르침은 1960년대 이후의 비약적 경제발전에 병행한 서구 문화 선진국의 에티켓과 결합, 그 속성을 더욱 강화했다.
이 '메이와쿠'와 짝을 이루는 문화 코드가 '세와(世話)'다. 세와는 그 방향에 따라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능동적 행위, 즉 남에게 베푸는 세와는 보살핌이나 배려다. 반면 수동적 세와, 즉 받는 세와는 신세를 지는 것이 된다. 일본은 능동적 세와는 부추기지만, 수동적 세와는 피하도록, 또 피하지 못했을 때는 반드시 보답하도록 가르친다. 전철의 좁은 자리를 비집고 앉는 대신 서서 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옆 사람들이 좁혀 앉아 자리를 만들어 주는 '배려'가 당사자로서는 '신세를 지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밖에 두드러지는 요소는 오랜 봉건사회 전통에서 비롯한 집단중심주의적 가치관이다.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는 독자적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이어져 내려왔다. 1867년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봉건제가 무너진 이후로도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에는 '바쿠한(幕藩) 체제' 당시의 행위인자가 살아있다. 15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봉건인자가 살아 남는 데는 현대의 봉건 소국이라 불릴 정도로 특유의 조직문화를 가꿔온 기업의 역할이 컸다.
**황 위원은 1995~96년, 98~2002년 두 차례 도쿄특파원을 지낸 일본통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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