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도호쿠 대지진/피해 현황]한국일보 김혜경 기자 기름 구하기 악전고투
"제발 몇 l만이라도 주세요." "밤새 기다려 겨우 20l 구했어요."
그들이 당장, 간절히 원하는 건 물이 아니었다. 쓰나미와 대지진으로 모든 걸 잃은 일본 센다이(仙台) 시민들은 목을 축일 물보다 차에 넣을 기름을 백방으로 찾고 있었다. 방사성물질 유출 가능성과 여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기름이 없어 속절없이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일본 동북부는 그렇게 멈춰 섰다.
14일 오전 센다이시 곳곳은 기나긴 차량과 사람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줄은 보통 100m에서 길게는 3㎞나 됐다. 그 끝에는 어김없이 주유소가 있었다. 기다림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주유소는 죄다 "기름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의 보풀이라도 잡고 싶다는 듯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센다이 주변은 심각한 기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지진으로 공급이 끊긴데다 이곳의 기름탱크에는 설상가상으로 화재가 났다. 한 주유소 직원은 "도쿄에도 기름이 없다더라"고 했다. 기름 부족 사태는 주유소 직원 일 15년 만에 처음 겪는다는 와타나베(32)씨는 "평소 30㎘ 정도 저장하는데 오늘 아침엔 5㎘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마저도 낮 12시가 되기 전에 거의 떨어졌다. 그는 "아껴둔 1㎘는 응급차량용"이라고 말했다.
"오전 8시에는 줄이 3㎞나 됐어요. 다른 지방에서 기름 넣으려고 왔다는 사람도 돌려보냈어요. 어디서도 기름을 공수할 수 없고 언제 들어올지도 몰라요." 그의 처지도 딱하긴 마찬가지였다. "친지가 연락이 안돼 찾으러 다녀야 하는데,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저도 발이 묶여 있습니다."
사카모토(31)씨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새벽 2시에 30분가량 달려와서 6시까지 줄을 섰는데 20l를 구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걸로 뭘 할 수 있겠나. 피난을 가고 싶어도, 아니 먹을 것 마실 것을 구하려고 해도 부족하다"고 탄식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름은 '긴급차량' 표지를 붙인 구호ㆍ응급차량에 우선 배정됐다. 다급한 일부 시민들은 딱지를 얻어와 기름을 달라고 했으나 다른 시민들의 제지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나마 LPG를 사용하는 택시와 시외버스가 간간이 눈에 띄지만 이조차도 언제 멈춰 설지 모르는 상황이다. 다수의 가스충전소 앞엔 '가스가 다 팔렸다. 입고는 미정'이라는 공지가 붙었다.
교통 마비로 인해 센다이는 사실상 고립 상태다. 불과 60㎞ 떨어진 후쿠시마(福島)의 원전 3호기가 또 폭발했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 다행히 식수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학교에서 얻을 수 있었다.
기자도 취재차량용 기름을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허사였다. 주유소 번호표를 쥐고 한없이 기다리기도 하고, 경찰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보험회사에 출동을 요구하기도 하고, 도쿄대사관에 전화도 걸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였다.
14일 오후 미야기 현청에서 빌다시피 사정해 '긴급차량 확인증'을 받은 후에야 겨우 13l를 얻었다. 하지만 그 양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60㎞ 남짓, 지진 피해 현장은 고사하고 인근 센다이 공항 취재만 가더라도 옴짝달싹 못할 정도의 양이다.
그러나 기름은 충전할 수 없지만 이곳의 인정은 충만했다. 기자가 묵고 있는 센다이 한국영사관에 피신한 한 한국 여행객이 들려준 얘기다. "인근 소도시에서 지진을 맞닥뜨렸어요. 정전에 먹을 것도 없고 휘발유가 없어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기름을 조금씩 나눠줘서 겨우 차를 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센다이=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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