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m의 거리에서 벌어지는'빠름'의 미학, 이름하여 '강속구'다.
박찬호(오릭스)가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던 시절, 그에게 매료된 건 당시만 해도 국내 선수로는 드물었던 강속구를 너무도 쉽게 뿌렸기 때문이다. 홈런의 비거리처럼 물리적인 힘을 거치지 않고 계측되는 수치는 타자들에게 위압감을, 팬들에겐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시범경기로 막을 올린 2011프로야구에서도 LG의 외국인투수 레다메스 리즈(28)로부터 점화된'광속 전쟁'이 화두로 떠올랐다. 리즈는 13일 대전 한화전에서 프로야구 출범 30년 만에 마의 160㎞ 벽을 돌파했다. 아직은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시범경기 첫 등판, 첫 타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구속이었다.
▲빛의 속도
투수에게 강속구는 가장 위력적인 무기다. 타자들의 기량이 향상돼 150㎞ 초반대까지의 직구도 쉽게 받아 치지만 리즈 수준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13일 리즈가 한화 첫 타자 강동우를 상대로 던진 2구째 160㎞짜리 직구는 홈플레이트까지 도달한 시간이 대략 0.371초였다.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18.44m지만, 투수가 발을 내디딘 후 팔을 앞으로 뻗어 공을 뿌리기 때문에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약 16.5m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리즈는 신체적인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리치(양팔을 양쪽으로 쭉 펼쳤을 때 양쪽 손끝 간의 길이)가 무려 207㎝로 키(189㎝)보다 18㎝나 길다.
긴 팔을 최대한 뻗어 160㎞의 공을 던진다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포수 미트에 꽂힌다. 타자들마다 투수가 던진 공에 대한 반응 속도가 다르지만 보통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난 후 0.2초 가량부터다. 리즈의 볼을 치려면 0.171초 안에 타격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사실상 공을 던지는 순간에 방망이가 나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배트 스피드가 빨라도 160㎞짜리 강속구를 친다는 것은 예측과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광속 전쟁
국내 프로야구에서 리즈 이전에 최고 구속을 던진 선수는 한기주(KIA)였다. 한기주는 2008년 5월8일 광주 삼성전과 2007년 5월27일 인천 SK전에서 159㎞를 찍었다. 전지훈련 연습경기에서 160㎞를 넘는 공도 던진 것으로 알려진 엄정욱(SK)의 최고 기록은 158㎞(2003,2004년)다.
왼손 최고는 서승화(LG)와 권혁(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156㎞다. 프로야구 초창기 강속구의 대표 주자였던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은 156㎞를 던진 기록이 있고, 고(故) 박동희(전 롯데)도 전성기 때 150㎞대 중반까지 뿌렸다. 박찬호는 한양대 재학 시절 이미 그들 수준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김진우(KIA)와 배영수(삼성)가 명맥을 이었으나 '광속구'라 불리기엔 미흡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지난해 9월25일 쿠바 출신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신시내티)이 샌디에이고의 펫코파크에서 기록한 105마일(약 169㎞)이 최고 스피드다. 조엘 주마야(디트로이트)가 2006년 기록한 104.8마일을 4년 만에 넘어섰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마크 크룬(전 요미우리)의 162㎞가 최고이며, 일본인으로는 사토 요시노리(야쿠르트)가 지난해 진구구장에서 요코하마를 상대로 161㎞를 던진 적 있다.
올시즌 국내에선 리즈 외에도 두산의 니퍼트, KIA의 트레비스, 한화의 마무리 오넬리가 150㎞ 전후의 빠른 공을 갖고 있는 정통파 투수들이다. 여기에 류현진(한과)과 김광현(SK), 이용찬(두산) 등 '토종'들이 가세할 '속도 전쟁'은 더욱 볼 만해졌다.
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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