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런데 인조는 부항(父行)의 매개없이 할아버지인 선조를 직승(直承)했다. 이 때문에 인조가 할아버지인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를 왕으로 삼아 아버지 자리를 채워야 하나가 문제되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종법상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다. 이 문제는 1623년(인조 1년) 인조가 정원군 가묘(家廟)에 반정사실을 고묘(告廟)할 때 불거졌다. 축문(祝文)에 정원군을 아버지라 쓸 수 있나 여부가 논란된 것이다.
김장생(金長生)은 인조가 선조를 아버지, 정원군을 백숙부(伯叔父)라 불러야 한다고 했다.(叔姪論) 밖에서 들어와 왕이 된 경우에는 할아버지를 이었어도 그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원군을 아버지라 부르면 아버지가 둘이 되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박지계(朴知誡)는 남의 후사를 이은 사람은 백숙부라 불러야 되겠지만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경우에는 생부를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고 했다.(稱考稱父論) 이 이론대로라면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따라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이 이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조신들은 대부분 반대였다.
그런데 1626년(인조 4년) 1월14일에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啓運宮) 구씨가 죽었다. 예관들은 왕자부인의 예에 따라야 한다고 했고, 인조는 국장의 예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조가 스스로 주상(主喪)이 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상복도 3년복을 입으려다 1년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28년(인조 6년) 계운궁상을 탈상(脫喪)할 때 정원군 추숭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논리적 근거는 박지계가 제공했다. 그런데 1630년(인조 8년) 12월 명나라 호부낭중(戶部郎中) 송헌(宋獻)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버지를 추숭해도 좋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에 고무된 인조는 1632년(인조 10년)에 추숭도감을 설치하고 정원군을 원종으로, 계운궁을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숭했다. 그리고 1635년(인조 12년) 3월에는 원종 내외를 종묘에 부묘(祔廟)했다. 이로서 인조가 즉위한 지 12년 만에 원종추숭이 마무리되었다.
원종추숭은 사림의 공론에 위배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반정세력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인조의 종법상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공론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원종추숭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법상의 입지가 튼튼하지 않으면 역모가 자주 일어나 정권이 불안정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추대된 왕이라 사랑하는 왕비조차 지키지 못했지만 인조는 직접 반정을 주도한 군주라 무리를 해서라도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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