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큰 눈동자에 창백한 얼굴, 분홍색 립스틱에 묘한 미소의 33세 중국 여성 덩신밍(鄧新明). 그가 몰고 온 이른바 '상하이 스캔들'은 우리 외교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고 세상을 온통 충격에 빠뜨렸다. 덩씨의 면모는 단순 비자브로커에서 중국판 마타하리 등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해 부적절한 관계도 마다 않고 유혹하거나 약점을 잡아 협박해 당사자들을 극한상황으로 몰아넣는'팜므 파탈(femme fataleㆍ숙명의 여인)'이라는 점이다.
오리무중인 덩신밍의 실체
하지만 이것 역시 덩씨의 전모가 아니라는 지적이 무성하다. 상하이 현지취재를 통해 덩씨와 알고 지낸 교민이나 중소기업인, 정부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의 추잡한 애정행각과는 달리, 덩씨가 중국 현지 맥을 연결하는 절실한 해결사이자 끈끈한 한국통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덩씨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각자의'??시(關係)'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꺼린다. 자신들의 신분 노출은 더더욱 두려워한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중국 현지에서 그들 역시 민원을 위해 덩씨의 현지 ??시를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덩씨는 중국 비즈니스를 위한 우리나라의 전문 로비스트였던 셈이다. 덩씨가 한국 외교관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민원을 잘 처리해줬기 때문이다. 해외 공관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유력 정치인이나 고위인사가 방문할 때 주재국의 주요 인사와 면담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는 일이다.
중국 고위인사들과의 면담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현안 없이 과시를 위한 중국 주요 인사와의 면담은 쉽게 성사되기 어렵다. 일정이 급할수록 면담 성사는 더욱 어렵다. 이럴 때 덩씨의 역할은 빛을 발했다. 덩씨는 이런 민원을 해결해 주는 대신 비자 발급과 관련한 이권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덩씨의 실체에 접근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정부 합동조사단이 14일부터 상하이 총영사관을 대상으로 벌일 현지조사의 중점사항은 이번 일이 '스파이 사건'인지 여부를 규명하는 데 맞춰져 있다. 덩씨가 소지했던 USB와 디지털카메라의 영상들을 근거로 총영사관에서 어떤 정보가, 어디까지 유출됐으며, 어떤 경로를 통해 덩씨의 손에 전달됐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 조사단의 첫 번째 과제이다.
덩씨가 각종 민원 해결사 역할을 한 배경에는 중국 공안국과의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정황근거들이 드러난다. 결국 민원처리 과정에서 중국당국에 자연스럽게 우리 정부의 기밀사항이 역으로 전달될 수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덩씨가 애초부터 스파이였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어쩌면 중국당국에 과시용으로 한국측 기밀사항을 넘겨줬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같은 의혹들이 덩씨 조사가 직ㆍ간접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현지조사과정에서 과연 얼마만큼 속 시원하게 밝혀질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개연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번 조사의 핵심포인트이다.
신속ㆍ조용하게 진실 규명을
돈과 여자가 얽혀 있는 스캔들은 흥행요소가 높다. 국가기밀을 노리는 마타하리가 주인공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중 수교 20주년을 앞두고 한국언론도 이젠 국익을 위해선 선정적 보도를 접을 때가 됐다. 이미 탈북자 처리문제 등 공개돼선 안 되는 한중 외교문제들이 발가벗겨지는 등 국익에 막대한 상처를 입혔다. 덩씨 실체 파악을 위해 정부 합동조사단은 앞으로 중국정부와의 물밑대화를 통해 신속하면서도 철저한 진실 규명작업을 벌여야 할 것이다.
장학만 베이징특파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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