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게 말을 더듬는 왕자가 얼떨결에 왕이 된 뒤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말더듬을 고치려 한다. 목숨을 위협하는 불치병이 등장하지도, 사회를 들었다 놓을 첨예한 갈등이 스크린을 채우지도 않는다. 과연 그 안에 무슨 드라마가 있고, 감동적인 시련 극복의 이야기가 있을까.
영화 '킹스 스피치'의 짧은 줄거리를 읽다 보면 '참 이런 맹탕이 다 있나'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그런데도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노른자라 할 상들을 다 손에 쥐었다.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가져간 이 영화, 밍밍한 듯 하면서도 매콤하고, 은근하면서도 강렬하다. 감동이 있으나 작위적이지 않고, 웃음이 있으나 천박하지 않다. 과연 아카데미의 선택이 옳았나에 대해 의문이 들지만 딱히 잘못된 결정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왕은 왕이되 왕이 아니다. '킹스 스피치'에 등장하는 조지 6세(콜린 퍼스)는 군림하나 통치 하지 않는 20세기 영국 왕이다. 내각 구성권은커녕 변변한 권리도 없는데 의무만 가득하다. 건실한 사생활과 위엄을 유지하며 국민 통합을 위한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얼마나 허울만 좋은 왕이었으면 조지 6세의 형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 심슨과의 사랑을 위해 궁궐을 박차고 나갔을까.
게다가 "예전 같으면 복장만으로도 위엄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시대가 변해 라디오 연설까지 능수능란하게 해야 한다. 고질적인 말더듬에 시달리는 조지 6세로서는 고약하기 그지 없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세치 혀로 독일 국민을 꼬드긴 히틀러가 영국과의 일전을 불사하고 나섰다.
영화는 힘 없는 왕을 코너에 몰아넣은 채 그가 조금씩 링의 중심으로 향하며 투지를 발휘하는 과정을 전달한다. 조지 6세가 "촌구석 호주 출신에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언어치료사 라이오넬(제프리 러쉬)의 도움으로 말더듬 증세를 조금씩 극복하는 모습은 가슴 찡하다 할 수 없지만 잔잔한 재미를 주기엔 충분하다.
소소한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킹스 스피치'가 선택한 전술은 왕의 인간적인 면모와 아름다운 우정 드러내기다. 형이 왕위에서 내려오려 하고 독일은 조금씩 숨통을 조여올 무렵 라이오넬을 찾은 조지 6세는 자신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고백한다. 왼손잡이여서 받았던 구박, 유모의 지능적인 괴롭힘, 형에게 말더듬이라고 놀림 받으며 증세가 심해졌던 사연 등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토로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조금씩 왕의 고뇌 속으로 진입한다. 말문을 트기 위해 조지 6세가 욕설을 마구 쏟아내는 장면도 웃기면서도 정감 있다.
대놓고 왕을 친구 다루듯 하던 라이오넬과 그런 그의 태도에 격분하던 조지 6세가 처음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도 쏠쏠한 재미를 던진다. 치열한 말싸움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을 만도 한데 조지 6세가 영화 막바지 라이오넬에게 던진 말은 "고맙네. 수고했소. 친구"다. 이에 라이오넬은 "감사합니다. 폐하"라고 답한다.
차분하고 섬세한 연출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연기가 발군이다. 1997년 '샤인'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제프리 러쉬와 올해 같은 상을 안은 콜린 퍼스의 연기 앙상블을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듯하다. 감독 톰 후퍼. 17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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