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민주화 혁명으로 친미정권들이 무너지면서 미국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저 코헨은 드물게 낙관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2011년 아랍 민중의 자각이야 말로 2001년의 진정한 해독제"라고 봤다. 가난과 독재에 신음해온 아랍 민중의 분노가 10년 전에는 종교적 근본주의와 결합해 9∙11테러를 낳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문제로 향하면서 제대로 된 답을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면서 코헨은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아랍 정서를 존중하고, 혁명 과정에서 민중 편에 서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을 거론했다. 그는 "수년이 지나도 역사가 제자리인 경우가 다반사인데 몇 주 만에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 이를 이끄는 행운의 지도자가 있다"며 "오바마는 잘 해내고 있다"고 풀이했다. 정치인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자원이 시대정신인데, 오바마는 역사의 격동을 마주하는 행운과 시대정신을 제대로 활용하는 능력을 겸비했다는 찬사다.
무릇 지도자는 시대와 정면 승부해야 한다는 이 말에 집권 4년차를 맞은 이명박 대통령을 대입해본다.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지난해와 비슷한 40%대이지만 실제 바닥 민심은 이보다 못한 것 같다. 또 여권 내 이 대통령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2009년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으로 국정 구심점을 마련하고, 지난해 공정사회 화두를 던지면서 동력을 재충전시켰던 이 대통령은 무기력해지고 있다. 청와대의 한 행정관은 "일이 터지면 팔짱 낀 채 코멘트 하는 이들은 많지만 팔을 걷어붙이는 참모들은 적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점점 짧아지는 이 대통령의 잔여 임기나 구제역, 고물가 등 잇단 악재에서만 기인된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이 시대적 과제들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면서 이런 상황이 초래된 측면이 짙다.
할 일이 뻔히 보이는데도 외면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박범훈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등 논란에 휩싸인 측근들을 중용하는 인사가 이어지고 있다. 공정 컨셉트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에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파문을 통해 퇴직 공직자들의 전관예우는 공정사회를 위해 반드시 짚을 과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정 후보자를 비토한 한나라당만 비난했을 뿐이다.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복지 논쟁에서도 비켜서 있었다. 이 대통령은 잔뜩 움츠린 채 정치권에서 발화한 이 논쟁을 지켜보다 '무상 논쟁'으로 흐르도록 방관했다. 논쟁을 자신의 중도실용 복지 기치를 보완하는 재료로 삼았더라면 그의 철학은 더욱 풍성해졌을 것이다.
반면 이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내놓은 개헌은 정면 승부할 대상이 아니라는 여론의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지금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시점이라고 가정했을 때 현정부에 '공정' '실용' '친서민'등의 마크를 붙여줄 국민이 얼마나 될까.
임기 후반의 대통령은 새 일을 벌이기보다는 추진했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5년간 국정을 책임졌던 대통령이 뭔가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정권에게도, 국민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국민들이 "지난 5년간 어떤 깃발 아래서 무얼 성취했지"라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면 곤란하다. 임기 말이라도 시대정신과 과감하게 승부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이영섭 정치부 차장 youn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