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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어른이 되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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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어른이 되는 순간들

입력
2011.03.1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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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인생에서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은 언제일까. 누군가에게는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같은 사회적 신분증을 발급 받던 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노동의 대가로 첫 월급을 받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알약도 못 삼켰던 민감한 시절

좀 터무니없지만 나는 알약을 순조롭게 삼킨 최초의 순간, 어른이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는 물론이고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캡슐이나 알약 같은 것을 삼키지 못했다. 몸이 아프면 학교에 못 가거나 친구들과 놀지 못해서가 아니라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약을 삼키지 못하니,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알약이나 캡슐을 먹어야 하는 일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캡슐에 든 항생제 같은 것은 캡슐을 벗겨내고 가루를 물에 개서 먹었다.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분말 형태의 약을 캡슐에 넣는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어서, 가루로 먹으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쓰고 신물이 올라온다. 반쯤은 구역질을 하면서 뱉어내고 반쯤은 물과 함께 갖은 인상을 쓰며 삼키다 보면, 약을 먹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난다. 아직도 간혹 속이 메슥거리거나 어디에선가 노린내가 나기라도 하는 것 같으면 숟가락에 개서 먹던 가루약 냄새가 떠오를 정도이다.

알약 같은 것은 좁쌀만한 크기로 잘라 삼켰다. 엄마가 다 큰 자식한테 언제까지 이렇게 해 주어야 하느냐고 한탄하며 칼자루 끝으로 알약을 눌러 으깨주었는데, 그 때문에 알약에서는 특유의 약 냄새와 함께 마늘 냄새가 났다. 마늘 냄새가 나는 약을 삼키지 못해 약 먹는 걸 포기하고 몸이 그저 낫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부모님이 억지로 약을 삼켜 먹어보도록 시키셨다. 아무리 해도 넘어가지 않은 약이 목구멍 언저리에 걸려 있는 느낌, 삼키지 못한 약이 혀뿌리에서부터 쓰고 메스꺼운 맛을 스멀스멀 퍼뜨리던 기분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약은 어느 날 갑자기 쑥 넘어갔다. 쓴맛이 나고 비릿한 냄새도 나고 종내 구역질을 일으키던 약을 어느 순간 순조롭고 매끈하게 삼켜 버림으로써 나는 쓴 줄도 모르고 약을 먹는 어른의 세계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국내 개봉한 조엘과 에단 코엔 형제의 영화 (원제 True Grit)를 보면서, 새삼 약을 처음으로 삼키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죽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키스하라는 장의사의 말에도 장례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따져 묻는 당돌한 14세 소녀가 용납할 수 없는 세계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돌연 소녀의 25년 후를 보여준다. 무표정하고 완강하며 차가운 말투의 어른이 된 소녀를 바라보는 슬픔은 고작 약을 삼키는 일이 뜻대로 안 될 때의 쓰라림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무감각해진 어른을 보는 슬픔

어쩌면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소녀의 말대로, 신의 은총 말고는 인생에 공짜가 없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인생의 쓴맛이나 비린 맛, 역겨운 냄새와 목구멍에 약이 걸린 답답함 조차도 이치겠거니 생각하며 무심해지고 무덤덤해지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약을 삼키게 되자 몇 알이나 되는 영양제도 한번에 쉽게 삼킬 정도로 약을 먹는 일에 능숙해졌고, 가벼운 진통이나 참기 싫은 두통, 보충해야 할 영양분을 쉽게 약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이토록 매끈하고 순조롭게 고통을 완화시키는 세계, 가벼운 통증이나 진통도 이내 잠잠해지는 세계, 그래서 다른 사람의 통증이나 세계의 통증에도 잠자코 있을 뿐 내색하지 않게 된 세계.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잠근,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녀의 얼굴을 보는 동안 삼키지 못해 신물이 넘어오는 약 한 알이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자꾸 간질거렸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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