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위대한 여행/앨리스 로버츠 지음ㆍ진주현 옮김/책과함께 발행ㆍ652쪽ㆍ2만5,000원
책 읽을 때 함께 들으면 적합한 음악을 페이지에 QR코드로 박아 넣는 게 새로운 유행인 듯한데 이 책에도 넣는다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좋겠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걸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저 유명한 오프닝신_넓적다리 뼈를 휘두르는 유인원의 포효를 통해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의 진화가 시작됐음을 상징하는 장면_의 배경으로 깔리는 장엄한 클래식 말이다. 이 책은 인류가 지난 200만년 동안 다섯 대륙을 무대로 펼친 웅대한 드라마의 기록이다.
저자 앨리스 로버츠(38)는 예일대 의대를 졸업한 영국의 해부학자다. 그를 매료시키는 것은 지층 깊숙이 수만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선조들의 뼈. 고대 인간의 질병과 신체 구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진화론과 발생학 등에 닿아 있다. 학벌에 더해 곱상한 외모까지 갖춘 덕인지 그는 방송사의 교양 과학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한다. <인류의 위대한 여행> 은 2009년 BBC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믿기 힘든 인간의 여정(The Incredible Human Journey)'의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인류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기행기의 틀을 취하고 있다. 출발지는 아프리카 남부의 나미비아 사막, 종착지는 남아메리카 칠레의 서해안 도시 몬테베르데다.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전 세계로 뻗어갔다는 아프리카 기원설에 따른 여정이다.
언어를 미처 갖기 전부터 인류가 DNA에 아련한 흔적을 남기며 걸어 온 발자국을 되짚었다. 이 책의 큰 장점은 쉽게 읽힌다는 것. 인류의 계보에 등장하는 숱한 호미닌(homininㆍ초기인류)의 학명과 지질ㆍ고고ㆍ유전학 등의 학술 개념이 무시로 등장하는데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생생한 현장의 숨결이 포착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을로 돌아가지 않았다. 부시먼은 밤에 물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밖에서 밤을 지내 보고 싶었다. … 내 침낭은 커다란 나뭇가지 아래쪽에 놓여 있었는데 이렇게 해야 코끼리에 밟힐 가능성이 낮다고 했다. 박쥐는 계속해서 다시 내 얼굴 주위로 날아왔다"(68~69쪽).
이처럼 진화의 현장에서 들려 주는 인류의 비밀이기에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예컨대 부시먼의 사막에서 인간 아킬레스건의 특이성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인류의 다리가 걷기보다 뛰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는 최근의 학설을 소개한다. "인류학자 데니스 브램블과 다니엘 리버만은 2004년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에 의하면 인류 진화 연구에서 달리기의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고 한다. 우리 조상은 왜 하필 에너지 소모가 적은 걷기 대신 달리기를 택했을까?" 저자는 생존을 위해 오늘도 빠르게 달릴 수밖에 없는 부시먼 사냥꾼들의 목소리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더러는 태고의 신화와 전설이 고고학의 연구 결과와 얽히기도 한다. "그들은 위협적 존재였나요? 내가 물었다./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가끔 어린이들을 납치해 가곤 했어요./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나는 에부 고고의 생김새에 대해 물었다./온몸이 털로 덮여 있었어요. 얼굴은 원숭이처럼 생겼어요./이것은 인류 역사상 많은 곳에서 일어나곤 하는 집단 간의 갈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호모사피엔스)가 아닌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이 동시대에 지구상에 있었다는 것은 좀 으스스한 게 사실이다"(189~198쪽).
책은 지구 공전 궤도의 변화로 인한 빙하기와 간빙기의 교체, 각 지역의 화석 자료를 분석한 생화학적 정보,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은 저널에 실린 최신 연구 성과 같은 과학적 사실을 주로 다룬다. 그럼에도 장과 장을 건널 때마다 이런 존재론적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인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헤아릴 수도 없는 삶과 죽음을 거듭하며, 인간은 왜 이토록 기나긴 여행을 계속해 왔을까?'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조상들이 아주 오랜 옛날 아프리카 대륙 밖을 나와 다양한 기후대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것은 멋진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수십만 년의 조상들은 아무도 '아프리카를 탈출해 전 지구로 퍼져 나가고야 말겠어'하는 영웅심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웅도 정복자도 아니었다. 우리 종이 이렇게 살아남았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도 결국은 당신 그리고 나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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