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20평 남짓의 서울 마포구 한 임대 아파트. 초인종이 울리자 서은(12ㆍ가명)이가 '아빠(?)'를 향해 총알처럼 뛰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를 몇 번이나 외치더니 먹던 점심마저 부리나케 치웠다. 계란프라이가 놓여져 있던 거실 가운데 텅 빈 탁자. "밥은 나중에 먹어도 돼요"라는 서은이가 방에서 가져 온 책과 형광 펜 등 필기도구를 가득 쌓아놓더니 웃는다. "선생님, 오늘은 어떤 훈련을 주실 건가요."
매주 토요일. 초등학교 4학년인 서은이는 영어와 컴퓨터 과외를 한다. 물론 무료다. 그는 지난해 9월 엄마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 북한이탈가정 자녀다. 분기당 300만원 가량의 정착지원금을 받아 생활하는 처지라 경제적 여유는 없다. 모녀는 당장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도 벅차다.
서은이의 과외 선생님은 경찰이다. 가끔은 선생님, 대부분은 형사님으로 불린다. 아빠 노릇도 한다. 서울 마포경찰서 보안계 신현익(56) 경위다. 신 경위와 서은이 가족은 "하나원에서 나와서 처음 만난 한국 사람"(서은이 엄마)이자 "가족 같이 보살펴 주고 싶은 모녀"(신 경위)라고 했다. 호칭은 여러 개지만 결국은 '가족'이란다.
사실 서은이 가족에게 경찰은 '무섭고 치가 떨리는 존재'다. 북한에서 경찰 역할을 하는 보안요원이 서은이 아버지를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이후 모녀는 2004년 함경북도 해령에서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 옌지(延吉)에서도 중국 경찰을 피해 6년 넘게 숨어 지내야 했다. 우연히 만난 조선족으로부터 한국 행을 권유 받아 돈을 주고 이 곳으로 올 수 있었다. 서은이 엄마(46)는 "길에서 차 불빛만 보여도 공안이 온다고, 자는 애 깨워서 산으로 도망가서 밤을 새웠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서은이 엄마는 "처음에는 경찰(신 경위)이 너무 잘해주니까 이상했다"고 했다. 신 경위가 서은이 모녀와 가족이 될 수 있었던 건 역시 정성이었다.
"빨래걸이 하나 없어 어쩔까 고민하는데, 마트에 데려가 이것저것 다 사줬다"는 경제적인 지원, "서은이 학교 입학을 시켜야 하는데, 애 손 잡고 직접 학교에 데려가 교사와 상담도 해주시고"라는 아빠 역할, "영어를 영 싫어하는 서은이가 이제는 '배아주겠다'(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아한다"는 교사 역할까지.
신 경위는 "당연히 경찰로서 해야 하는 임무"라고 했다. 현재 마포서 보안계 직원은 총 8명, 이들은 100여 가구가 넘는 관내 북한이탈 주민의 정착을 지원 및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서은이 모녀가 무사히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또 한 명의 가족 노릇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은이는 지난 성탄절에 신 경위에게 카드를 썼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라는 간단한 안부였지만 서은이는 "아빠처럼 항상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근데 선생님 이 이상한 건 왜 써요. 약속은 지키실 거죠." 영어 발음기호를 일일이 공책에 써 내려가던 게 못마땅했는지 서은이가 신 경위에게 물었다. 이번 어린이날, 신 경위는 서은이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에 가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단 "시험을 잘 보면"이라는 여느 아빠와 딸 사이의 조건도 붙었다.
서은이 엄마는 "모르는 게 있으면 일일이 형사님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이제 내가 돈도 벌고 잘 살아야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경기 부천시의 국제직업전문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있다.
남상욱 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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