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지(杜氏). 사케(일본술)를 만드는 양조장인을 일본에서는 토우지라 부른다. 30여 년 전 교토대의 한 과학자가 우연히 노년의 한 토우지를 만났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토우지의 얼굴에서 손으로 옮겨갔다.
시선이 손에 멎는 순간, 과학자는 발견했다. 노인의 손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희고 곱다는 것을. 연구실로 돌아간 과학자는 토우지의 늙지 않은 손의 비결이 효모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350여 가지 효모를 5년간 연구한 과학자는 기어이 피부에 유용한 성분을 찾아냈다. SK-Ⅱ라는 유명 화장품 브랜드는 이렇게 탄생했단다.
늙지 않는 손에서 만들어지는 사케, 참 여성적인 술이다. 사케 만드는 과정은 사랑하는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섬세하고 정성스럽다. 분위기마다 계절마다 음식마다 사케 궁합은 조금씩 다르다. 그날 분위기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는 이성 친구 같다. 사케, 알면 알수록 점점 빠져드는 술이다.
수작업 고집하는 정성
화장품을 탄생시킨 효모는 사케 양조의 핵심이다. 효모를 대량으로 배양하는 과정을 일본에선 슈보(酒母)라고 부른다. '술의 어머니'란 뜻이다. 효모는 쌀에 들어 있는 당분(포도당)을 알코올과 탄산가스로 바꾼다.
사케에 쓰는 효모는 다른 미생물(잡균)과 섞여 있으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대신 산성 환경에 특히 강하다. 마치 우리네 어머니 같다.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있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없이 약하고 평범한 존재처럼. 하지만 어려운 환경이 닥칠 때 어머니는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사케 양조장에선 그래서 효모를 배양하는 용기에 유산균을 넣어 내부 환경을 산성으로 만든다. 다른 잡균의 번식을 막고 효모만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양조장에서 슈보와 함께 토우지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건 누룩이다. 쌀을 깎고 술을 짜내고 거르는 등 대부분의 양조과정이 기계화한 지금도 누룩 빚는 과정만은 수작업을 고집하는 양조장도 많다. 옛 토우지들은 좋은 사케를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이 누룩, 다음이 효모라고도 했다. 누룩은 쌀의 전분을 잘게 쪼개 당분으로 바꾸는 효소를 만들어낸다. 찐 쌀에 곰팡이를 번식시켜 만들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누룩제조실 온도는 항상 35도를 유지한다.
찐 쌀과 누룩, 효모, 물을 4일 동안 3번에 걸쳐 섞는 발효과정을 모로미(醪)라고 한다. 다른 술에 비해 제조에 손이 특히 손이 많이 가는 단계다. 모로미 후 약 15도 온도에서 한달 정도 발효를 거친다. 발효가 끝나면 술을 짜내 걸러내고 60~65도의 열을 가해 효소 활동을 억제시킨 다음 숙성시킨다. 5년 이상 숙성된 사케는 따로 주쿠슈라고 부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케의 알코올 도수는 20도 안팎이 된다. 보통은 여기에 물을 첨가해 도수를 15~17도로 조절한다. 물을 첨가하지 않은 사케는 따로 겐슈라고 부른다.
향미로 보는 4가지 사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일식당 모리앤에서 일하는 사케 소믈리에 전수진 대리는 "고유한 향미에 따라 사케는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소개했다. 기호와 상황에 따라 가장 잘 어울리는 사케 유형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래서 알면 알수록 더 찾게 되는 술이 바로 사케라고 전 대리는 말했다.
맛과 향이 모두 진한 유형이 바로 주쿠슈. 5년 이상 숙성시켜 황금빛이 나는 주쿠슈는 일본 현지에서도 가장 비싼 사케다. 35도 정도로 마시면 걸쭉한 단맛과 강한 감칠맛, 약간의 쓴맛과 신맛까지 모두 느낄 수 있다. 된장이나 간장과 닮은 향이 여운으로 남는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나 가을, 겨울 분위기에서 식후 마시는 술로 잘 어울린다.
준슈는 맛은 진하지만 향은 연한 유형이다. 양조용 알코올을 첨가하지 않고 쌀과 누룩으로만 만든 준마이가 대부분 준슈에 속한다. 쌀로 만든 술 고유의 깊은 감칠맛이 특히 잘 살아 있다. 진한 양념의 서양요리나 중국요리와도 궁합이 맞다. 전 대리는 "준슈는 한국식 탕 요리에도 잘 어울리고, 나이 드신 어른이나 사케를 좋아하는 남성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45도 정도로 데워 마시면 카스테라나 찐빵 닮은 향도 느껴진다. 다른 유형보다 향미가 남기는 여운이 길다.
준슈와 반대로 맛은 엷지만 향은 진한 유형은 쿤슈. 정미율이 낮은 다이긴조(50%)나 긴조(60%)가 전형적인 쿤슈다. 정미율은 사케 원료인 쌀을 깎아낸 정도를 말한다. 정미율이 60%면 쌀의 40%를 깎아냈다는 얘기다. 정미율이 낮을수록 더 순수한 속살로 만든 사케다. 향이 과일이나 꽃처럼 화려하고 맛은 상쾌하다. 전 대리는 그래서 사케를 처음 접하는 여성 고객에게 주로 쿤슈를 추천한다고. 10도 정도로 차게 마실 때 쿤슈의 향은 배나 사과, 멜론을 연상시킨다. 이보다 더 차면 독특한 향이 가려질 수 있다. 요즘 같은 봄철부터 초여름 식전 입맛을 돋우기에 좋다.
맛과 향이 모두 연한 소슈는 누구라도 가볍게 마실 수 있다.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사?중 가장 많은 유형이다. 양조과정에서 가열처리를 하지 않고 숙성기간도 짧다. 쓰거나 시거나 한 자극적인 맛이 적어 차게 마셔도 부담이 없다. 깔끔하고 부드럽고 촉촉한 맛, 신선하고 청량감 있는 향이 특징이다. 종류에 따라 호두나 나무껍질, 아몬드 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연회나 파티, 아웃도어에도 잘 어울린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사케 소믈리에 수료 한국인 100여명… 40% 현업 활동
일본 현지에서 교육을 받거나 인터넷을 통해 사케 소믈리에(키키자케시) 자격을 취득한 한국인은 지난해 상반기 기준 150여명. 사케 소믈리에는 일본 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직업인을 말한다.
2000년대 들어 꾸준히 늘고 있는 사케 수입량에 비하면 국내에 전문가는 매우 적다. 이에 지난해 3월 일본술서비스연구회(SSI)의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 교육과정이 국내에 처음 개설됐다. SSI는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은 유일한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 발행기관이다.
지금까지 이 교육과정을 거쳐간 사람은 총 100여명. 그 중 약 85%가 최종 시험을 통과해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다. 교육과정을 들여온 시너전스(SSI코리아) 측은 자격증 취득자의 약 40%가 요식업 분야에서 일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박원용 시너전스 대표는 "현재 요식업 종사자 말고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직장인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수강생도 많다"고 말했다.
사케 소믈리에 말고도 일본 술 전문가 자격은 3가지가 더 있다. 먼저 소주어드바이저.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하거나 알코올을 물로 희석해 만든 일본 소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서비스할 수 있는 자격이다. 사케 소믈리에와 소주어드바이저 자격을 갖추면 주장(사카쇼)과 주학강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사카쇼는 탁월한 일본 술 시음 능력을 인정받은 프로테이스터. 술의 질을 판별하고 향미를 가려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매기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일본 술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주학강사는 화술과 프리젠테이션 능력, 이벤트 기획력도 인정 받은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일본 술을 가르칠 수 있다.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일본인 사카쇼는 154명, 주학강사는 132명이다. 박 대표는 "소주 어드바이저와 주학강사 교육과정도 곧 국내에서 개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SI 사케 소믈리에 교육과정은 총 6주간 주 2회 수업으로 이뤄진다. 한 기수당 정원은 15명. 강의는 서울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 전산원 문화정보교육센터에서 진행된다. 수업을 마치면 3차에 걸쳐 한국어로 시험을 치른다. 1차 시험은 술 이론, 2차는 서비스 이론, 3차는 시음(테이스팅) 실기다. 수강료는 1차 시험 응시료를 포함해 250만원이다. 26일 시작되는 11기 교육과정은 현재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문의 02-828-7332, www.ssikorea.co.kr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What's hot? 쌀과 누룩만으로 만든 준마이 3종 국내 첫선
Q. 기자
원료인 쌀과 물의 생산지, 정미율, 알코올이나 물 첨가 여부, 효모 종류 등에 따라 일본 현지에 수백 가지 사케 브랜드가 있다고 하죠.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그 중 극히 일부라고 들었습니다. 국내에서 흔히 맛보지 못한 사케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사케 애호가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되겠네요.
A. 박경재 서울신라호텔 사케 소믈리에
요즘은 일본에 있는 양조장 140여 곳 가운데 양조용 알코올을 첨가하지 않고 순수하게 쌀과 누룩으로 만든 준마이만을 취급하는 데는 단 21곳뿐이에요. 그 중에서도 최대 규모의 준마이 양조장으로 꼽히는 곳이 이자카와현 가나자와에 있는 후쿠미츠야(福光屋)입니다. 1625년부터 사케를 만들어온 양조장이죠. 지하 150m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과 사케 양조용 고급 쌀 야마다니시키를 이용해 준마이만을 만듭니다.
이곳의 프리미엄 사케 3종이 서울신라호텔을 통해 요즘 국내에 처음 소개되고 있어요. 이삭 끝에서 알갱이가 큰 쌀만 선별해 양조한 미즈호는 다이긴조(정미율 50%)급의 겐슈(물을 첨가하지 않은 탁주)입니다. 화려한 향과 부드러움이 특징이죠.
전통적인 긴조(정미율 60%) 제조법으로 담백하게 만든 카가토비는 긴조 특유의 풍부한 향과 날카로우면서도 깔끔한 맛이 잘 살아 있어요. 목 넘김이 부드러워 술을 잘 못하는 여성들도 음미할 수 있는 나마자케(양조과정에서 열 처리를 하지 않은 생주) 카가토비도 있죠. 나마자케는 유통기한이 술병을 연 뒤 1주일 이내로 짧습니다. 문의 02-2230-3356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