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이 개발한 신기술을 대기업이 빼앗을 경우, 실제 발생한 피해액의 세 배까지 배상금을 물릴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전격 도입된다. 우리나라 법 제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재계와 법조계 등에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10일 법안심사소위와 전체 회의를 잇따라 열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하도급거래 공정화법(하도급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김기현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법안은 대기업(하청을 준 원사업자)이 하청업체 기술을 유용하거나 탈취했을 때, 손해액의 세 배까지 보상하도록 있도록 했다. 손해로 발생한 피해액에 더해, '죗값'으로 몇 배를 더 치르라는 뜻이다. 기술 탈취가 고의였는지 과실이었는지를 입증할 책임도 대기업이 스스로 져야 한다.
이 법을 주도한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하는 경우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보장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여야 합의를 통해 상임위를 거친 만큼, 이 법안은 법사위나 본회의도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계와 법조계 일각에서 예전부터 징벌적 손해배상제 자체를 한국 법체계에 도입하는 데 반대해 온 상황이라, 본회의 표결 처리를 앞두고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일단 재계는 명백한 반대입장이다. 전국경제인연합 중소기업협력센터 양금승 소장은 "기술 탈취ㆍ유용은 분명 잘못이지만 3배 보상까지 하라는 것은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며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에 어긋나 위헌 소지가 있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법조계에서는 남소(濫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승소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액수가 크게 늘다 보니 소송이 늘고, 일부 변호사들이 이 같은 소송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것. 또 현행법 체계에서 죗값을 돈으로 내는 것은 국가에 대해서만 가능(벌금ㆍ과태료 등)한데, 사인(私人)들끼리 돈으로 죄의 대가를 주고받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론도 있다.
대신 기술 수준이 뛰어난 중소기업이나 상당수 변리사들은 이 법안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위즈덤 국제특허법률사무소의 최형준 변리사는 "한국은 기술 침해를 당해도 법원에서 정해주는 배상액이 적고 형사처벌도 솜방망이 수준"이라며 "기술 침해 처벌을 강화하면 기술 개발을 더 열심히 할 동기도 부여되고, 이에 경제도 더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도급법 주무부처이지만 애초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반대 입장을 유지해 왔던 공정위는 떨떠름한 반응이다. 공정위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 법안을 밀어붙인 홍 최고위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의 위세에 눌려 입장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punitive damages)란
손해를 입힌 사람의 행위가 악의적이거나 반사회적일 때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다. 배상액을 높여 유사한 행위의 반복을 막자는 것이 제도의 취지. 주로 영미법계 국가에서 도입 중인데, 미국 민사재판에서 종종 수억~수십억 달러의 천문학적 손해배상이 선고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때문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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