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경제학
불과 5년 전 일이다. 그는 ‘왕의 남자’로 1,250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당시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이었다. 같은 해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게 추월당했지만 역대 흥행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의 남자’ 이전에 만든 ‘황산벌’로는 300만 관객을 웃겼다. 이만하면 국민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그런 그가 상업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최신작 ‘평양성’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라지만 대중들에겐 느닷없기만 하다. 도대체 지난 5년간 이준익 감독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의 부침은 한국 영화계의 현실과 무관한 일이기만 한 것일까.
열심히 영화만 만든 감독의 은퇴 선언
이 감독은 지난 5년간 충무로에서 가장 열심히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왕의 남자’로 국내 흥행 역사를 바꾸더니 곧바로 2006년 가을 그는 ‘라디오 스타’로 극장을 다시 찾았다. 2007년엔 직장인 음악 밴드를 그린 ‘즐거운 인생’을 개봉시켰고, 2008년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님은 먼 곳에’를 발표했다. 지난해엔 동명 원작 만화를 필름으로 재해석한 사극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선보였다. 이 감독의 은퇴 표명에 결정적 영향을 준 ‘평양성’까지 그는 5편의 영화를 1년이 멀다 하며 내놓았다. 그의 말대로 “한두 달도 쉬지 않고 영화만 만들며 보낸” 시기다.
영화를 열심히 만들었지만 흥행 운은 그의 성실함을 따라 주지 않았다. 외형상 관객 수치는 좋은 편이었다. ‘라디오 스타’는 188만2,000명(투자배급사 집계), ‘즐거운 인생’은 126만5,000명, ‘님은 먼 곳에’는 180만명,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140만명이 찾았다. ‘평양성’은 170만명을 모았다. 하지만 돈을 제대로 못 벌었다는 게 문제였다. 본전 수준의 수익을 올린 ‘라디오 스타’를 제외하면 4편이 적자로 장부에 기록됐다. 재앙 수준의 큰 손실을 부른 영화는 없었지만 가랑비에 온 젖듯 적자 영화들이 조금씩 늘면서 그의 위상을 위협했다.
불황ㆍ대형 투자배급사 독과점도 영향
불황의 터널 속에 있는 충무로의 현실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국 영화계는 2006년을 정점으로 불황에 빠져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꾸준히 줄고 있는 제작비가 그 증표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자료에 따르면 2006년 40억2,000만원이었던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는 2007년 37억2,000만원, 2008년 30억1,000만원, 2009년 23억1,000만원을 거쳐 지난해 21억6,00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 4년 만에 반 토막이 난 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들여 영화를 만들어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 영화의 편당 평균 수익은 -3억9,000만원(영진위 추정치)이었고 평균 수익률은 -8%였다. 140편이 개봉해 21편만 흑자의 단맛을 보았다. 100편 중 평균 17.1편만이 단돈 100원이라도 돈을 번 셈이다. 2009년 평균 수익률 -19.6%에 비해 나아졌다고 하지만 배우 개런티와 스태프 임금 조정 등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돈을 많이 댈수록 더 많은 돈을 잃는 시장이니 투자자들이 선뜻 지갑을 열 리 없다. 우회상장을 통한 제작비 마련 길도 막히면서 충무로에 돈이 마르게 됐다. 투자자들은 감독의 흥행 기록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고, 스타 배우 캐스팅에 촉각을 더 기울이게 됐다.
독과점적 위치에 있는 대기업 계열의 투자배급사 CJ E&M 영화사업부문과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불황을 이기기 위해 돈줄을 조이고 엄격한 투자 관리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는 형국이다.
업계에 따르면 CJ E&M 영화사업부문은 투자 결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이란 목표를 위해 그린 라이트 커미티(Green Light Committee) 제도를 운영 중이다. 대표이사와 본부장, 주요 팀장들이 참여해 어느 영화에 투자할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이성적 의사결정을 지향하기 때문에 극도의 위험 회피 심리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흥행이 검증된 감독이나 배우의 영화들은 투자받기 유리한 반면,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감독은 투자받기 힘든 구조다.
쇼박스나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다른 대형 투자배급사들의 투자 결정 과정도 CJ E&M 영화사업부문 크게 다르지 않다. 제 아무리 1,000만 감독이라도 적자 영화가 잇따르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자의 반 타의 반 성격 짙어
이 감독의 오랜 영화적 동지인 ‘평양성’의 제작사 타이거픽처스의 조철현 대표는 “이 감독 영화에 투자하겠다는 회사는 아직도 있다. 다만 이 감독이 자기가 한 말을 지키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1,000만 영화 ‘왕의 남자’의 후광은 여전히 남아 있어도 빛은 많이 바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 감독은 ‘왕의 남자’ 이후 충무로 주요 투자배급사와 영화를 만들어 왔다. ‘라디오 스타’는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현 CJ E&M 영화사업부문)의 투자와 배급으로 관객과 만났다. ‘즐거운 인생’의 투자배급사는 CJ엔터테인먼트였고, ‘님은 먼 곳에’는 쇼박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SK텔레콤이었다. ‘평양성’은 롯데엔터테인먼트의 투자ㆍ배급으로 개봉하게 됐다.
CJ E&M 영화사업부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는 3대 투자배급사로 불리는 충무로의 큰 손이며 SK텔레콤은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지닌 중견 투자배급사다. 유력한 투자배급사를 거치면서 흑자라는 신뢰를 던져 주지 못한 이 감독이 이들과 다시 일하기는 당분간 쉽지 않다. 이 감독이 ‘평양성’ 개봉 전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면 상업 영화 감독을 은퇴하겠다. 투자할 사람도 없다”고 말한 이유다. 그의 상업 영화 은퇴 표명은 자의 반 타의 반인 셈이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한국 영화 중흥기였던 2000년대 초반이라면 이 감독은 요즘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다음 작품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라며 “이 감독의 은퇴 표명은 한국 영화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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