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교수 되면 정년보장 떼놓은 당상'… 철밥통 깨기가 1순위 과제재임용 기준 느슨… 논문도 年1, 2편이면 충족사실상 퇴출 무풍지대… 강의 평가 등 신경 안써"학생 돕는 서비스맨 자처 영미교수 정신 본받아야"
서울의 한 사립대 A교수는 소위 인기 교수다. 강의에는 항상 학생들이 넘쳐난다. 그의 강의에는 매 학기 수강신청 전쟁이 반복된다. 수업 내용이 어렵지 않을뿐더러 학점도 후해서다. 하지만 그의 어떤 강의든 내용은 몇년째 똑같았고 시험 문제도 매 학기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주 휴강을 한다. 수강생들은 "뭘 배우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일단 수업 부담이 없다"고 이구동성이다. A교수는 지금 정부 요직에 있다. 일부 동료 교수와 학생들은 "그렇게 원하더니 결국 꿈을 이뤘다"고 했다. 한 대학원생은 "A교수가 정부 일을 잘할만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학문을 갈고 닦아 그 깊이를 더하고 인재를 키워 세상에 이바지하는 게 교수의 본업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수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학문연구는 어느 틈엔가 뒷전이 됐고,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학문외적인 일에 더 열성인 경우가 적지 않다. 교수가 인재를 키우기는커녕 자신의 수족으로 전락시키는 풍토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교수 신분의 철밥통 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한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
대학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정년을 보장받는 교수직을 얻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통상 임용 후 3년에서 7년 정도. 조교수로 임용된 뒤 이 기간 내 재임용 심사를 통과해 부교수가 되면 사실상 정년을 보장받는다. K대 문과대 L교수는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별히 밉보이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되는 구조"라고 했다.
재임용 심사 기준도 엄격하지 않다. 연구실적 75%, 기타실적 25% 식의 기준이 있지만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또 이러저러한 정상 참작 요소에다 특정 논문을 연구실적으로 인정할지 여부도 심사교수의 재량에 많이 좌우된다. Y대의 한 조교수는 "보통 조교수들의 연구실적이 부족할 경우 학과 선임 교수의 뒤치다꺼리나 행정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가 심사에서 참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지난 2008년 카이스트가 25명의 재임용 신청 교수 중 6명을 탈락시킨 것이 한국 교수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년 보장을 받은 이후부터는 사실상 '무풍지대'다. 일부 대학에서 연구 실적이 부족할 경우 지도 학생 수를 제한(고려대 등)한다든가, 성과급 차별을 통해 제재(서울대 등)를 가할 뿐이다. 서울대 이과계열 S교수는 "승진할 때나 교수평가를 신경쓰지, 정년 보장받고 나면 아예 신경을 안 쓴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대학들은 어떨까. 영국 세인트앤드류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는 유학생 이모(34)씨는 "이곳에서는 임용 후 15년 정도가 돼야 정년을 보장받는다. 이 기간 안에는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긴장감이 있다"고 했다. 논문 평가는 물론, 강의 평가가 수시로 이뤄지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즉각 조사위원회가 열려 제재가 가해진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학기 학생과의 상담 기준(최소 10회)을 채우지 못한 이씨의 지도교수는 "왜 6번밖에 학생과 상담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학교 본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미 하버드대는 정년 보장 심사 대상자와 전공분야가 비슷한 세계 20위권 대학의 교수 3~5명의 연구업적과 발전 가능성을 비교해 정년 보장 여부를 결정한다. 교수가 자기 학문분야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교수 평가는 사실상 무용
우리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정년 보장이 이뤄지지만 연구실적과 강의평가 위주로 행해지는 교수 평가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연구실적은 사실상 최소한의 평가대상이고 강의를 포함한 교육활동 평가는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K대 정경대학의 한 대학원생은 "연구실적은 1년에 1~2편의 논문 발표 수준"이라며 "이것도 안 하면 솔직히 학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학생들이 하는 강의평가는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 식이다. 제자가 지도교수의 수업에 '동원'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학원 수업에서는 냉정한 평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사과정의 한 대학원생은 "모 교수가 강의하는 수업의 수강생 8명 중 반 이상이 직속 제자들"이라며 "안 좋은 평가가 내려지면 지도교수가 이들을 소집해 캐묻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반면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생인 K씨는 "문화 차이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가끔 교수가 학생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교수와의 상담 횟수, 수업 중 프레젠테이션 사용 횟수, 만족도 등 꼼꼼한 평가가 진행되며 학교가 제시한 기준에 미달될 경우 교수는 즉각 소명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게 K씨의 설명이다.
영국 유학생 이씨는 "학생들의 강의평가가 3년 연속 기준 이하로 떨어지고 연구실적까지 부족하면 교수로서의 생명은 끝"이라며 "교수들이 학생들의 질문이나 요구에 즉각 반응하는 등 학생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씨의 지도교수는 평소 이씨에게 "나는 당신이 논문을 잘 쓰도록 봐주는 서비스맨"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인재 양성의 책임을 진 한국의 교수사회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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