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
다큐멘터리이면서 극영화다. 문예영화의 외양을 지녔는데 감정을 파고드는 드라마도 껴안고 있다. 쉽지 않은 제작환경이었을 텐데도 삶을 바라보는 자기 목소리가 여전히 또렷하다. 어쩔 수 없는 여러 한계가 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대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는 한지(韓紙)에 대한, 한지에 의한 영화다. 한지라는 소재에 매몰될 수 있는 영화인데도 간단치 않은 화두와 울림을 던진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을 통해 만년 7급 공무원을 탈피하려는 필용(박중훈),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영화감독 지원(강수연), 뇌경색 후유증에 시달리는 필용의 아내 효경(예지원)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전통을 논한다. 요컨대 '달빛 길어 올리기'는 한지에 대한 소중한 기록물이자 소소한 재미도 함께 주는 영화다.
초반 카메라는 한지를 소개하는 데 집중한다. 한지의 역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얽힌 사연이 TV 화면과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후 아내 병수발을 하는 필용의 비루한 처지, 필용과 지원의 미묘한 감정 교류, 고향을 잃은 효경의 향수가 겹치며 영화는 감정의 파도를 탄다.
임 감독은 등장인물들에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고 메시지를 전한다. 출세욕으로 한지 사업을 맡은 필용이 한지에 빠져드는 모습은 생업을 위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가 영화작가로 거듭난 임 감독의 인생역정을 대변한다. 대상을 완벽하게 탐구한 뒤 카메라에 담으려는 지원의 직업정신은 감독의 삶의 자세로 비친다. 남편의 바람 때문에 병을 얻고 집안에 틀어박혀 불편한 몸을 운신하는 효경은 한지(또는 감독 자신)로 상징되는 전통을 은유한다. 가장 소중한 것이면서도 냉대 받는 전통에 대한 감독의 연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렇게 영화를 관통하다.
아름다운 장면이 여럿이지만 특히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동공에 남는다. 심산유곡에서 장인들이 종이를 '길어 올리는' 장면은 정성을 다해 한 컷 한 컷을 얻고자 했던 대가의 의지와 오버랩 되며 큰 울림을 준다. 전주시와 전주국제영화제 지원으로 제작돼 시정을 홍보하는 듯한 장면이 눈에 거슬려도 대가의 힘은 거부할 수 없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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