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회는 이번 TV수신료 인상이 공영방송 재원을 튼튼히 하고, 우수한 프로그램으로 세계 속에 한류를 확산시키며, 나아가 민족의 자랑이자 세계 ○○○○ 시장의 보고인 ○○○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란에 들어갈 말은 뭘까. KBS는 8일 수신료 인상을 지지한다는 이 단체의 성명서를 대신 배포하고 9시 뉴스에도 보도했다. 정답은 한의사, 전통의약, 한의약이다. 수신료 인상과 한의약 세계화를 연결 짓는 것도, 공영방송이 일개 이익단체의 성명을 배포하는 것도 생뚱맞다.
사정은 이랬다. 지난해 말 한의원이 잘 안 된다는 뉴스가 나간 후 대한한의사협회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런 저런 경로로 만난 KBS 인사들이 수신료 인상 얘기를 흘렸다. 동의보감 조명 등 한의학계를 살릴만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도 제작비가 모자라 못한다는 것. 방송의 파급력을 잘 아는 협회는 KBS 관계자들과 접촉할 때마다 비슷한 얘기를 들었고, 최근에는 수신료 인상을 지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협회로서는 굳이 KBS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최근 KBS 수신료 인상을 지지하고 나선 단체는 30여개. 지난달 28일 독립제작사협회를 비롯해, 2일에는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MC 등으로 구성된 한국방송실연자협회와 한국방송예술인노동조합, 3일에는 한국코미디협회 한국가수협회 한국연기자협회, 4일에는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가 줄줄이 성명을 냈다. 시기도, 내용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엇비슷했다.
여야 합의로 임시국회에서 수신료 월 1,000원 인상안 처리는 물 건너 갔지만, 이번 주 임시국회 종료 전까지 최대한 많은 단체들을 수신료 지지파로 끌어들여 인상안 상정을 압박하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여야가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뜨거운 감자’를 잠시 식히기로 공모하자 다급해진 KBS가 여론몰이에 나선 모양새다. KBS는 방송사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단체들은 물론, 별 관련이 없는 이익단체들까지 동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총국들이 나서 해당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등 전방위 공세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30년 묵은 KBS 숙원사업을 이 참에 해결하려는 조급함이 오히려 부작용을 낳고 있다. KBS 안에서도 홍보 과욕에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법인 명의로 된 사원들 휴대폰 통화연결음을 일제히 수신료 홍보 멘트로 바꿔 반발을 산 데 이어, 방송사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새 사가(社歌)를 틀어 원성이 자자하다. 노래는 ‘우리는 KBS 사랑과 정의를 전해주리라/ 우리는 KBS 기쁨과 행복을 함께 하리라/ KBS 한국방송’으로 끝난다. 한 PD는 트위터에 찬송가 같은 멜로디와 내용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라며, 강요한다고 사랑이 생기는 건 아니지 않냐고 토로했다.
공정성이나 프로그램 질을 높이려는 노력은 뒷전인 채 수준 낮은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공영방송. 누가 이런 방송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려 할까.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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