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관일까… 체념일까… 바깥세계를 잠시 접은 '배움의 時空'
지곡서당(芝谷書堂)으로 가는 차는 특별시에서 시로, 다시 읍에서 면으로 단위를 낮춰 가며 차례로 경계를 건너 지둔리(芝屯里)라는 이름의 마을에 닿았다. 광화문 언저리에서 출발해 서당까지 2시간 남짓. 새 고속도로가 뚫렸다는 사실은 진즉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에 실려 있는 낡은 지도에는 구리와 마석을 지나는 옛길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옆에 누가 탔다면 또 그 놈의 내비게이션 좀 사라는 타박깨나 들었을 법했다.
헌데 서당으로 간다면 왠지 이리 가는 게 맞다 싶은, 오연한 뚝심이 뱃구레에서 뭉근히 끓어올랐다. 말하자면 이런 류의 객기. 공맹(孔孟)의 내학(來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측로(側路)가 어인 말인가! 라디오는 "디도스 백신을 위장한 악성코드가 패치관리시스템을 통해 PC를 공격하는 새로운 사례가 발생했다"는 세간의 뉴스를 웽웽댔지만 학이시습(學而時習)의 묵향 속을 달리는 듯한 느긋한 착각을 어그러뜨리지 못했다.
서당, 봄이 오는 캠퍼스
지곡서당은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에 있는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의 별칭이다. 3년 과정의 한문교육 기관으로 1963년 설립 이래 200여명의 석ㆍ박사급 연구자들이 거쳐 갔다. 이곳에선 1학년 때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四書)를 모두 암송해야 2학년 진급 자격이 주어진다. 1학년의 최종 시험인 <맹자> 총강(總講)은 총 3만8,000여자에 이르는 <맹자> 를 통째로 배송(背誦ㆍ책을 덮어 놓고 입으로 외는 것)하는 것. 한 사람이 시험을 치르는 데만 네 시간이 넘게 걸린다. 맹자> 맹자> 중용> 대학> 맹자> 논어>
서당으로 찾아간 날은 경칩을 나흘 앞둔 2일. 봄학기 개강일이다. 지둔리의 논두렁은 겨울의 한기를 토해 내고 물컥한 윤기를 두르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은 옅은 뜨물빛으로 가라앉았고 멀찍이 축령산 등성마루는 사탕가루 같은 잔설을 이고 있었다. 요컨대 매너리즘에 젖은 19세기 산수화 같은 풍경. 아정히 꿇어앉아 경을 읽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그러나 학생들의 모습은 그런 진부한 기대를 유쾌하게 배반했다. 오후 3시께 시작한 3학년 수업의 풍경은 대략 이러했다.
청강생인 스님 한 명을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 중 슬리퍼를 끌고 들어오는 학생이 일곱, 무릎이 툭 튀어나온 트레이닝 바지도 일곱, 헐렁한 후드티셔츠가 다섯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묻힌 것으로 보이는 머리는 겨우 둘. 편안히, 또는 삐딱이 앉은 품은 거의 예비군 정훈교육장이다. 태동고전연구소장 김만일 교수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듯 바로 초서(草書)체로 판서를 시작했다. "이번 학기엔 윤동규(1695~1773)의 <소남집(邵南集)> 을 공부해 봅시다. 아직 한글로 번역된 적 없는 문집인데…." 소남집(邵南集)>
태동고전연구소라는 이름의 뉘앙스와 달리 서당엔 분방한 자유가 흐른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을 빼곤 학생들을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빨갛게 머리를 물들이고 다니든, 밤새 술을 마시든, 이성 친구가 와서 자고 가든 모두 자유. 다만 학업에선 살벌하리만치 엄격하다. 총강을 통과하지 못하면 1년 동안 아무리 정이 들었어도 서당을 떠나야 한다.
"여기선 바깥과는 다른 시간이 흘러요"
서당은 몇 동의 한옥과 팔작지붕을 얹은 3층 콘크리트 건물로 구성돼 있다. 콘크리트 건물 1층에 강의실이 있고 2층과 3층은 학생들의 개인 연구 공간이다. 2학년 이길현(33)씨의 방으로 올라갔다. 원효 연구로 서울대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그의 방은 빼곡히 꽂힌 책과 컴퓨터 두 대가 놓인 책상 사이로 겨우 두어 사람이 앉을 공간을 남겨 놓고 있었다. 3학년들은 우선 이씨부터 만나 보라고 했다. 지난달 <맹자> 총강을 가장 늦게, 또 힘겹게 통과한 게 그라고 했다. 맹자>
"스트레스요? 말도 못하죠. '이 사람들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지?' 하는 마음도 들고요. 하다 하다 안 되면 소리를 지르거나 산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래서 애들이 내 호를 고성방가로 지었어요. 아침에 '악'하는 소리에 놀라서 깨곤 했는데 그게 내가 낸 소리래요. 1학년 땐 대부분 수면장애를 겪어요. 외운다고 외웠는데 강할 때는 뇌가 아예 부팅이 안 되는 거에요. 가끔 머리가 돌아갈 땐 살면서 힘들었던 상념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서당에선 1학년의 암송 과정을 강(講)이라고 부른다. 선생님이 듣는 앞에서 노래하듯 지난 시간 배운 것을 외야 하는데 이를 '강을 바친다'고 표현한다. 매 시간 한 단락씩 외는 것이 단강(單講), 한 권을 다 끝내고 통째 외는 것이 총강이다. 거의 유격훈련이라 할 만한 뇌의 중노동. '어떻게'보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학부 또는 대학원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비판적 논증을 단련해 온 학생들이 아닌가.
이씨의 대답은 담박했다. "믿어야죠. 이게 한문을 익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데. 숱한 선배들이 그걸 증명하잖아요." 그러나 그의 표정엔 어쩔 수 없는 격절감이 엿보였다. "내가 잊혀지는 것 같은 생각도 들죠. 남들은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유명한 저널에 논문도 싣고 그러는데. 난 여기서 개구리처럼 공자 맹자만 외고 있으니. 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데 1, 2년 먼저 가고 늦게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3학년 박병훈(30)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사람은 여기서 못 버텨 내요. 달관과 체념이랄까, 시간에 대해 무딘 사람들만 남게 되죠. 근데 안에서는 무지하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아도 밖에서 보면 여기가 굉장히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대요. 다른 곳에서는 결코 3년 안에 사서삼경을 다 떼지 못 하거든요. 바깥과 여기는 서로 다른 차원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아요."
어스름이 내리고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방마다 불이 켜졌다. 서당의 학생들은 대부분 야행성이다. 저마다의 무문관(無門關) 수행에 들 시간. 강을 하는 1학년 학생들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빼고는 밀도 높은 침묵이 쌓여 갔다.
공부에 몰두하면 배고픔을 잊는다
이튿날 오전 10시께 강을 바치는 1학년 강의실 문을 열어 봤다. 입학하고 첫 강이다. 여섯 명 신입생은 선생님과 동학들 앞에서 <논어> '학이(學而)' 편을 외야 한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유붕자원방래불역열호인부지불온불역군자호…." 학생들의 얼굴은 차례로 벌겋게 상기됐고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차분히 듣던 선생님이 말했다. "50번 읽어서 안 되면 100번 읽고, 100번 읽어서 안 되면 200번 읽으세요. 머리보다 입에 붙을 때, 한문은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논어>
3학년 전병수(32)씨의 방은 개울을 굽어보는 한옥에 있었다. 목련과 벚나무로 고즈넉하게 감싼 아름다운 건물이다. 아직은 꽃눈이 단단히 얼어 있지만 공부가 깊지 않다면 봄 한 철을 허투루 보내게 만들 풍경. 이곳을 차지한 전씨는 서당에서 유일하게 결혼한 학생이다. 학생 가운데 유자(儒者)의 이미지를 찾자면 그가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고아한 말투를 지녔고 풍류를 알았다. 차를 대접하려다 물통이 비어 있는 걸 보곤 슬며시 웃었다. 그리곤 술병을 꺼냈다. 더덕과 당귀를 넣어 담근 17년 묵은 술이란다.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난 그냥 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느껴요. 상당히 매력이 있죠. 이 공부를 해서 어디 한 자리 얻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박사 학위 받은 뒤 뭐하냐고 누가 물으면 그냥 시골 내려가서 농사 짓겠다 그래요. 그래서… 가족들한테 좀 미안하긴 해요." 전씨처럼 한문 자체가 좋아서 있는 학생은 드물다. 그에겐 3년 과정의 한문교육 기관만 한국고전번역원과 유도회에 이어 태동고전연구소가 세 번째라고 했다. 동학들은 '도장 깨기' 또는 '그랜드슬램'이라고 농을 쳤다. 전씨는 그 부박한 추임새마저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 줬다.
한림대는 학비와 생활 공간을 제공하는 것 외에 한 달에 40만~60만원씩 장학금을 지원한다. 파격적 대우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일거리가 전무한 외딴 서당에서 20, 30대 젊은이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돈이기도 하다. 연거푸 담배 몇 대를 피우고 나서 한 학생이 뱉은 말이 아프게 들렸다.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시다고 해서 갔는데 결국 또 거기서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 나라에서 이런 공부를 한다는 게 참…."
몇 끼니의 밥을 함께 나누고 서당을 떠났다. 이 휘황한 디지털 시대에 십삼경(十三經)을 파고들어 정말 먹고 살 자신이 있냐고, 품고 간 질문은 미처 꺼내지 못했다. 학생들이 외는 <논어> '술이(述而)' 편의 한 구절이 그 대답을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분망식(發憤忘食) 락이망우(樂以忘憂) 부지노지장지운(不知老之將至云). 공부에 몰두하면 배고픔도 잊고, 배움이 즐거워 근심을 잊는다. 심지어 나이 드는 것도 잊을 지경이다. 논어>
유상호기자 shy@hk.co.kr
■ 태동고전연구소, 1963년임창순이 설립한 3년 과정 한문교육 기관
태동고전연구소는 청명 임창순(1914~99)이 한문 고전을 연구하는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63년 서울 수표동에서 설립한 교육 기관이다. 74년 경기 남양주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왔고 85년에는 한림대에 인수돼 부설연구기관이 됐다. 3년 과정의 한문 연수과정을 운영하고 고전 문헌 번역 및 연구, 학술지 간행, 고전번역서 출판, 학술대회 개최 등도 수행한다.
이 연구소의 중심은 교육이다. 76년 1기 한문연수원생을 선발한 이래 매년 학생들을 선발해 사서삼경을 가르친다. 올해 2월 수료한 30기까지 총 210명이 연수 과정을 마쳤다. 이 가운데 100여명이 전국 대학에서 교수나 강사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30여명은 박물관과 미술관 등에서 연구자로 일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임창순은 한학자였지만 4ㆍ19혁명에 앞장섰다가 성균관대 교수직을 박탈당할 정도로 진보적 학자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후학들도 각종 시국선언의 서명란에 단골로 이름을 올렸다. '지곡서당파'로 불리는 이들은 주자를 절대화하는 학계의 흐름과 달리 고전 연구와 현실 사회의 접점을 찾느라 늘 고민했다. 현재 연구소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도 거기에 맥이 닿는다.
79년 임창순은 서당 건물을 신축하면서 상량문에 이렇게 썼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모여 민족의 장래를 의논하는 그런 전당이 되는 것이 이 서당의 기본정신이다… 다만 바라는 바는 이 집에서 영원하도록 글 읽는 소리 그침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연구소는 영어ㆍ한문ㆍ구술 시험을 통해 매년 10명 이내의 학생을 선발한다. 선발된 학생에겐 전원 연구실(기숙사)가 제공되고 3년간 수업료는 전액 면제된다. 2학년 때부터는 다른 대학원 과정과 병행하면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 지난해 한국고전번역원의 권역별 거점연구소(중부권)로 지정돼 국가 번역 프로젝트도 수행하고 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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