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미녀들의 수다'라는 TV 프로그램에 나온 한 출연자가 "키 180cm 이하 남자는 '루저(loser)'"라고 말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루저란 한국말로 패배자 혹은 실패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사건은 사회적 약자나 타고난 외모와 능력이 부족한 이웃을 따뜻한 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는커녕 그들을 패배자라고 낙인 찍고 경멸하고 천대하는 풍조가 일상화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게임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야유를 퍼부을 뿐만 아니라 따돌리거나 공격까지 하는 험악한 세상이 돼가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인터넷에는 소위 '루저 대란', '루저의 난'이라고 할 만큼의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 발언을 한 출연자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 것. 어쩌면 그런 잔인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지속적으로 상처를 입어왔던 사람들이 본인의 잘못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키까지 들먹이며 루저라고 낙인을 찍어버리자 참고 참아왔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사회에 일반화하기 시작한 승자독식의 경쟁은 극소수의 승자(winner)와 절대다수의 루저(loser) 사이의 간격을 엄청나게 벌여 놓았다. 예를 들면 스타급 연예인은 출연료가 수천 만원 대를 넘나들고 광고를 비롯한 수입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올라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반면 대다수의 무명 연예인들은 한 달에 100만원도 채 안 되는 실수입으로 버터야만 하는 격차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극소수의 승자들이 쓸어가는 어마어마한 돈의 상당부분은 결국 절대다수 루저들의 몫에서 갹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절대다수의 루저들이 모두 로또복권을 사주고 그렇게 모인 돈을 당첨자인 승자가 싹 쓸어가는 메커니즘이 사회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셈이다. 아무튼 이런 조건에서 루저는 생계조차 담보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임시일용직, (반)실업자, 영세상인 등으로 전락해가면서 극심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즉 루저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비참한 자기 처지를 경멸하고 혐오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이 자기혐오감은 자기와 똑같은 이웃들에게로 확산된다. 루저들은 루저인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또 다른 루저인 다수의 이웃들까지도 혐오하게 된다.
루저라는 손가락질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거나 수치심으로 몸서리치게 만들고 급기야 극심한 공포까지 느끼도록 한다. 루저로의 전락은 곧 사회로부터의 배제를 뜻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크다고 본다.
군인이 적의 총구를 향해 죽음을 불사하고 돌격할 수 있는 것도 애국심보다는 실은 동료집단에서 배제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저라는 단어가 유발하는 공포의 본질은 사회적으로 무가치해지는 것, 사회에서 버림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잉여인간'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이는데, 그야말로 사회에 필요 없는, 남아도는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루저이든, 잉여인간이든 사람에게 그 이상 가는 무서운 말도 없을 것이다.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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