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다니는 김한국(51ㆍ가명)씨. 1960년생으로 전형적인 베이비부머(1955~63년 출생자들)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70년대 중ㆍ고등학교를 다녔고,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대학을 졸업했다. 한 때는 ‘386세대’로 불리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군대 다녀오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신 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는데 이젠 은퇴를 생각할 나이가 됐다. IMF때 감원고비도 넘겼고, 몇 차례 구조조정도 피했지만, CEO가 되지 않는 한 길어야 5년이면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 같다. 어차피 정년(58세)은 무의미한 얘기니까.
김 씨는 은퇴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직 아이들은 학생인데 그래서 들어갈 돈이 태산인데, 벌써 은퇴라니. 딱히 배운 기술도 없고, 그렇다고 창업할 형편이나 성격도 못 된다.
가진 것도 별로 없다. 어렵게 마련한 집 한 채가 전 재산. 금융자산은 전무하다시피하고, 그나마 대출금도 아직은 다 못 갚은 상황이다. 그는 “은퇴 후 30년은 더 살 텐데 기댈 곳이 이 집 한 채라니 기가 찰 노릇”라고 말했다.
은퇴가 시작된 베이비부머들의 삶은 김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와 메트라이프 노년사회연구소가 8일 공동발표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의 삶’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지금도 하루 평균 9시간, 일주일 평균 6일을 일하고 있으며 한달에 386만원 정도를 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대부분 도시에 거주하며 학력은 고졸 이상. 베이비부머들의 88%는 스스로를 ‘중간계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베이비부머들은 이제 은퇴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 이들은 은퇴 후 삶을 ‘막연하게 낙관’하고 있지만, 실제론 무방비상태로 노후를 맞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생각하는 은퇴후 생활비는 최소 211만원. 하지만 노후를 위해 저축이나 투자하는 금액은 월 17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나마 절반은 어떤 금융상품에도 가입하지 않은 상태라고 답했다.
포트폴리오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자산 중 82.4%가 부동산에 편중돼 있는 것. “나이가 들수록 현금화가 쉬운 금융자산을 늘리고 부동산자산은 절대 피하라”는 게 노후 재테크의 제1원칙이지만, 베이비부머들은 오히려 정반대 자산구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은퇴하면 집을 팔아서 노후자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답했지만, 과연 집이 제 때 제 값에 팔릴지는 누구도 장담 못한다.
재산 만큼이나 건강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일벌레처럼 살아온 탓에 베이비부머의 약 3분의1(34%)은 만성질환을 갖고 있었다. 13.5%는 최근 1년간 우울증상을 겪었고, 8.2%는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한경혜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교수는 “베이비부머들은 은퇴와 동시에 자녀들이 결혼적령기에 접어들고, 부모세대도 초고령기에 진입해 경제적 부담은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다”며 “이들이 하루 빨리 실질적 노후 준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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