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농촌에서는 1960년대에나 봄직했을 '보릿고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벼를 도정해 쌀을 만들어야 하는 주요 미곡종합처리장(RPC)마다 원료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그에 따라 산지 쌀 가격도 올라가는 추세다.
쌀 재고가 사상 최고인 상황에서 쌀이 모자라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제 국민이 선호하고 소비하는 2010년 햅쌀은 모자라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정부 미곡 창고에 보관 중인 150만톤이 넘는 쌀 가운데 상당수는 해묵은 쌀이어서 사실상 시장에 격리된 상태"라고 말했다.
햅쌀이 품귀 현상을 빚게 된 건 지난해 쌀 작황이 30년 이래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쌀 생산량은 429만톤으로 당초 예상했던 434만톤을 훨씬 밑돈다. 게다가 수확기인 늦가을에 태풍이 불어 벼를 도정하면 얻는 쌀의 비율(수율)이 예년보다 크게 낮아졌다. 전북 김제의 한 RPC 관계자는 "정부는 쌀 생산량이 전년에 비해 12% 감소했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높다"고 말했다.
최근 육류가격이 급등하면서 곡물 소비가 늘어나는 것도 햅쌀 수요와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육류 가격이 상승하면 대체 식품인 곡물수요도 늘어나는데, 올해는 특히 돼지고기 가격이 폭등하면서 약 4만톤 가량의 쌀 대체 소비 증가가 예상된다.
지난해 흉작과 육류가격 급등이 수요와 공급측면의 요인이라면, 최근의 쌀 상승 추세를 부채질하는 것은 유통단계에서 벌어지는 마찰적 요인이다. 요컨대 쌀 값이 올라갈 것으로 보이자, 일부에서 재고조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선 RPC의 경우 벼의 공급원인 일선 농가가 재고를 풀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자금력이 부족해 수매 철에 1년치 벼를 한꺼번에 사들일 수 없다"며 "수확기에 4, 5개월 물량을 사들인 뒤 이듬해 2, 3월에 추가로 물량을 확보하는데 올해는 '3월에는 값이 뛸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농가가 물량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도 "최소 올해 7, 8월까지 공급할 물량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가격이 계속 오르기 때문에 일부 대농들이 기다리는 상황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는 그러나 햅쌀 품귀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쌀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도 올해 식량으로 필요한 햅쌀은 358만톤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먹을 쌀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농식품 관계자는 "전국 RPC 대부분이 지난해 가을 사들인 재고가 소진되자, 한꺼번에 벼 구매에 나서면서 일시적으로 가격이 상승한 것일 뿐"이라며 "곧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쌀값이 조기에 안정되지 않으면 정부가 보유한 2010년산 쌀을 우선 공급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2009년 쌀을 시장에 풀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편 이번 사태로 가뜩이나 영세한 일선 RPC는 경영상의 압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원료인 곡물 구매가격이 올랐지만, 정착 도정한 쌀을 일선 유통업체에는 지난해 가격 그대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자체 판매망이 없기 때문에 유통업체에 인상된 곡물가격을 전가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전북 김제의 한 RPC에서 근무하는 김모씨도 "지난해에 비해 원료곡(40㎏ 기준) 구입 가격이 1만원 가량 올랐는데 유통업체에는 예전 가격 그대로 팔고 있다"며 "특히 대형 유통업체는 큰 거래처이기 때문에 쉽게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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