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환으로 영화사에 둥지… 28세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자기 나이(77세)보다 많은 영화를 만든 임권택 감독의 삶 역시 한편의 영화였다. 1934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한 그는 18세 때 광주 숭일고를 중퇴, 혈혈단신으로 낯선 부산에 정착했다. 시쳇말로 가출한 것이다. 가족 중에 좌익이 많다는 이유로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갔다. 그는 "같은 민족끼리 좌우로 나눠 싸웠던 시대였다. 꿈도 희망도 없었다. 젊은 시절 노동판을 전전했던 것도 시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알고 지내던 군화 장사꾼들이 서울로 올라가 영화사를 차린 뒤 그를 부른 것이다. 심부름 등 잡일을 할 사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사에 둥지를 튼 그는 제작부에서 소품을 담당하면서 영화를 처음 접했다. 이후 연출부로 옮겨 7년이 넘게 어깨너머로 연출을 배우면서 감을 익혔고, 국내외 서적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그 때 "영화가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28세인 1962년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초기엔 다작(多作)감독이었다. 1960, 70년대에는 10년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다. 임 감독은 "먹고 살기 위해 막 찍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80년대부터 그의 영화는 작품성에 방점이 찍혔다. 특히 우리 역사와 전통, 한국적 사랑과 삶이 짙게 투영됐으며, 그것은 임 감독 스스로 부대끼며 살아온 삶이었다.
상복도 많았다. '춘향뎐'으로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대상과 감독상, 제20회 하와이국제영화제 최고작품상, 제45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이상 2000년)을 받았으며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 청룡영화상 감독상(이상 2002년)을 수상했다. 또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금곰상(2005년), 제10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특별공로상(2002년)을 받았다.
그는 1979년 49세 나이로 여배우 채령(62)씨와 결혼, 아들 둘을 뒀으며 둘째 아들 권현상(22ㆍ본명 임동재)씨가 영화 '고사2'에 배우로 출연했다.
1970년대= '잡초(73년), '맨발의 눈길'(76년), '상록수'(78년), '깃발 없는 기수'(79년), '짝코'(80년)
80년대= '만다라'(81년), '길소뜸'(85년), '씨받이'(85년), '티켓'(86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89년), '장군의 아들'(90년)
90년대= '서편제'(93년), '태백산맥'(94년), '춘향뎐'(99년)
2000년대= '취화선'(2002년), '하류인생'(2004년), '천년학'(2007년)
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