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암의 글이 어렵다고요?… 웃음·눈물 가득한 우리들 이야기죠"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가는 누구일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을 앞에 놓고 전호근(48)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겸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가 대중강의를 하고 있다.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인 아트앤스터디(www.artnstudy.com)를 통해 1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이 강의의 제목은 '5,000년 최고의 문장을 읽는다'. 이 강의에서 전호근 교수가 꼽은 우리 역사 5,000년 최고의 문장가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강의는 그래서 박지원의 글을 모은 연암집에서 16편을 골라, 수강생과 함께 번역을 하고 글에 얽힌 사연을 풀어나간다. 연암집은 그 내용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가 거의 없었다.
강의의 제목대로 연암이 과연 최고의 문장가일까. 구한말 학자 김태경은 "연암의 글에는 공자, 맹자, 소동파, 한유, 구양수의 문장이 다 녹아 있다"며 "연암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라고 했다. 역사학자 김성칠, 철학자 박종홍, 북한의 국어학자 홍기문 등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으니 강의 제목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호근 교수가 볼 때 연암의 글은 표현이 생생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나며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래서 전 교수는 "글 속의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하고 연암 자신이 마치 그 인물이 된 듯 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열녀함양박씨전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의 한 단락을 보기로 든다.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은 지새기도 어렵더라. 만약에 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 들며 낙엽 하나가 뜰에 지고 외기러기 하늘을 울고 가며 멀리서 닭 울음도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면 이런저런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 고충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이럴 때면 나는 이 엽전을 꺼내 굴려서 온 방을 더듬고 다니는데 둥근 것이라 잘 달아나다가도 턱진 데를 만나면 주저 않는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또 굴리곤 한다. 밤마다 늘상 대여섯 번을 굴리면 먼동이 트더구나."
전호근 교수는 "연암이 글 중의 과부라도 된 듯 절절한 마음을 드러냈다"며 "글을 읽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연암의 문장은 장자에서 따온 것이 많다. 장자는, 땅이 숨쉬는 것을 바람이라 하는 식으로 스케일 큰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연암은 이런 문장 스타일을 빌리되, 거창한 것 보다는 일상의 작은 것을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연암의 이 같은 문장관은 공작관문고서(孔雀館文稿序)라는 글에서 한껏 드러난다. 그는 글에서 논어를 인용, 글은 뜻만 드러내면 그만이라고 하면서도 진실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볼 때 진실한 글은,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를 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좇게 되지만 평범한 이야기를 쓰면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암이 거지, 과부 같은 하찮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코 고는 소리 등을 묘사한 것은 이런 문장관에서 비롯됐다. 이런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그는 현란하고 구체적이며 비유적으로 표현해 놀라운 글 솜씨를 발휘한다. 연암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 보기로 전 교수는 불이당기(不移堂記)라는 글을 든다.
불이라는 이름의 당(堂ㆍ조선 사대부의 가옥)에서 지내는 친구 사함을 위해 쓴 글인데, 사함이 대나무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원에 대나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연암에게는 고민이었던 것 같다.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 사함은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날씨가 추워진 뒤 내가 또 그대의 마루에 오르고 그대의 정원을 돌아다니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사함의 정원에 대나무는 없지만 사함이 어려움을 겪고도 자신의 뜻을 잃지 않는다면 사함 스스로가 대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비유의 절묘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공작관문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시골 사람이 코를 고는 장면을 연암은 이렇게 표현했다.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서 어떤 때는 토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휘파람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탄식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우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불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솥 안의 물이 끓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빈 수레기 덜컹하는 것 같고 숨을 들이 쉴 때는 드르렁 하며 톱질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 쉴 때는 마치 새끼 돼지가 씨근대는 소리가 났다."
이런 연암의 글은 그가 활동하던 18세기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 시기 책을 읽어주는 사람, 직업적 필사가, 서점 등이 등장하면서 책의 내용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독자들은 평범한 자기네 이야기를 다룬 연암의 글에 특히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연암의 글을 모두가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정조는 연암의 글이 글 쓰기의 기본을 흔든다고 판단하고 패관소설과 잡문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문체반정을 일으킨다. 전아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야 한다고 보았던 정조가 연암의 분방한 문체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전호근 교수는 그러나 정조가 연암을 아주 미워하지는 않았으며 일종의 애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연암의 글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쓴 농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극찬하기도 했다. 사실 연암은 마음만 먹었으면 왕실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그에게 조정은 과거에 응하라고 권고했지만 분방한 연암은 과거시험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장남 종의가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보려 하자 그것마저 막아 버렸다. 연암은 그의 글만큼이나 호방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것이다.
■ 연암집을 읽으려면
연암의 글을 모은 연암집은 한문으로 돼 있다. 따라서 원문으로 읽으려면 한문 독해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워낙 어려운 한자가 많기 때문에 웬만한 실력으로는 쉽지 않다. 그러나 훌륭한 번역본들이 많이 나와 있어 연암 글의 매력을 접하기는 어렵지 않다.
연암집 번역본으로는 한국고전번역원과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나온 것이 유명하다. 둘 다 한학자 신호열 선생과 그의 제자인 김명호 서울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연암집 가운데 열하일기만 따로 뽑아 별도의 번역본을 내기도 했다. 보리출판사는 북한의 리상호가 1955년 번역한 열하일기를 2004년 발행했다. 도서출판 돌베개는 2009년 김혈조 영남대 교수의 번역본을 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씨는 열하일기를 재해석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2003년 그린비출판사에서 출판했다.
■ "억지로 교훈 찾기보단 감정을 느끼는 게 중요"
전호근 교수는 2일 서울 마포구 민족의학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연암집에는 웃음과 눈물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연암집에서 억지로 교훈을 찾기보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_연암집을 평가해달라.
"조선 사대부의 일반적인 문집은 시, 상소문, 보고서 등을 많이 실은 반면 연암집은 산문이 많다. 열하일기 같은 본격적이고 방대하면서도 자세한 여행기도 연암집에서만 볼 수 있다. 연암집은 1805년 연암이 죽은 뒤 아들 종간이 편집한 필사본을 바탕으로 1900년대에 들어서 어렵게 간행됐다. 열하일기 등 연암집의 글이 오랑캐를 찬양했다는 이유 등으로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쉽게 묶을 수 없었다."
_연암이 지향한 가치관은 무엇인가.
"18세기 조선에서는 중세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새로 들어온 근대적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 때문인지 연암의 글 역시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가령 1764년 지은 에서 연암은 '명나라의 천자는 우리 임금의 임금'이라며 성리학적 사대주의를 드러냈다. 반면 열녀함양박씨전병서에서는 과부가 비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남편 따라 죽지 못했다는 이유로 열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또 북학의서에서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에게라도 물어보라고 한다.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보자면 모르는 것은 도를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지 행인에게 물으면 안 된다. 열녀 이야기나 행인에게라도 물어보라는 것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벗어난 그의 근대지향성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_연암에 필적할 문장가를 꼽는다면.
"연암 스스로 인정한 문장가가 있다.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함께 어울렸던 이덕무다. 두 사람은 글을 주고 받으며 문장을 가다듬었다. 이덕무의 글이 전통적인 문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자 연암이 적극 변호했다."
_연암집은 언제 접했는가.
"대학 다닐 때 연암집에 대해 알게 됐지만 강좌가 없었고 쉽게 익히기 어려웠다. 연암집이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기왕이면 어려운 것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도전했다. 대학 4학년 때와 대학원 시절 한국고전번역원 교수로 있던 한학자 이진영 선생 집으로 찾아가 연암집을 공부했다. 낯선 한자가 많은데다 내용과 관련한 고사도 찾아야 했으므로 책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
● 전호근
성균관대 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특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어, 맹자, 주역 등 동양고전을 강의하고 고전 번역에도 참여했다. 등의 책을 냈으며 장자와 동몽선습 등을 번역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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