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파로호/김영남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ㆍ105쪽ㆍ7,000
"잎 뒤 숨어 있는 사연들/일러바칠 곳 없는 동네/우물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이여"('앵두가 뒹굴면' 중). 중).
서정적 고향 뒤란에 숨은 은밀한 에로티시즘. 멋 모르는 소년이 그걸 영양제로 알고 주워 먹는다는 유쾌한 반전의 위트가 입가를 웃음 짓게 한다.
<가을 파로호> 는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윤동주문학상 중앙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을 수상한 김영남(54)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정동진역> (1998) <모슬포 사랑> (2001) 등에서 향토적이고 수려한 서정의 정서를 드러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향수 사랑 욕망 등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다채로운 은유와 위트로 촘촘히 그린 50여편의 시를 선보이다. 특히 최근 시들이 산문화하거나 전위적 기법으로 난해해지는 경향에 반발하듯 정제되고 함축적인 메타포로 시 본령의 서정성을 드러낸다. 모슬포> 정동진역> 가을>
표제작 '가을 파로호'에서 시인은 강원 화천군의 파로호를 보면서 호주머니를 떠올리고 그 자신이 호주머니가 돼 호수와 일체가 되는 마음을 그려나간다. "저 호수, 호주머니가 없다/불편하다/뭔가 넣어두었으면 좋겠는데/너덜너덜한 생각 거두고 싶은데/심플 젠틀 모던 이런 단어들이 지나간다/내가, 호주머니 되어보기로 한다/호수의 거추장스러운 손들을/모두 한번 거두어 주기로 한다/갑자기 호수가 사라진다/(중략)/누가 내게 쪽배를 띄운다."
시적 메타포의 전통적 대상인 꽃들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수련 목련 동자꽃 나팔꽃 능소화 할미꽃 코스모스 호박꽃 등의 이미지를 통해 이별과 기다림, 그리움의 정서를 다양하게 변주해 낸다. "저 배, 내 앞/닻을 내린 저 흰 배/나는 싣지 않고 떠나가것지요"('목련' 중)처럼 목련을 떠나갈 배로, "오해로 돌아선 이/그예 그리움으로/담을 타는 여인"('능소화' 중)에선 능소화를 담을 타는 여인으로 그린다.
메타포의 향연을 그리고 있는 시인은 "모든 기법을 수렴해 꼭대기로 올라가면 메타포가 있다고 믿는다"며 "이번 시집은 거기에 충실해 내 능력 안에서 '메타포 사전'을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썼다"고 말했다."지금 나는 고급 메타포를 배우고 있다/좋은 메타포란 얼마나 높은 곳의 새알이며/잘못 놓으면 얼마나 위험한 낭떠러지냐/경영학에 메타포가 융합되니/섬은 정말 장엄하다 위태롭기까지 한/제스처가 숨어있다"('벼랑 위 소나무 내게 끌어들여' 중).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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