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마음의 고요한 백지 위를 걷다 나온 기분이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숲과 들을 지나며 아직 녹지 않은 눈밭과 완만한 언덕을 오르내리기 꼬박 7시간. 시끌벅적한 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한적한 시골 길에서 말벗이라면 상쾌하게 뻗은 소나무들뿐이었다. 누군가는“하루에 이렇게 많은 소나무를 본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강원 바우길 11구간의 17㎞. 제법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그 길이 끝난 뒤 사람들의 표정엔 벅찬 흐뭇함이 퍼져 있었다. 초등학생 아이는 “뿌듯하다”고 했고, 가족과 함께 온 한 주부는 “인터넷 검색하다 얼떨결에 오게 됐는데 뜻하지 않게 횡재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내 쌀쌀한 바람을 맞은 탓에 얼굴이 시렸지만 함께 걸은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를 녹이는 듯했다.
매 주말 바우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단장은 소설가 이순원(54)씨. “글은 안 쓰고, 왠 길이냐”는 눈총이 따가울 법한데도 주말이면 고향인 이곳으로 달려오는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글쓰기와 무관하지 않을 터다. 고속도로가 뻥뻥 뚫렸지만 시골 오솔길이 사라지는 모습이 의사소통이 활발해진 인터넷 시대에 외려 마음의 길이 뚝뚝 끊기는 상황과 닮은 것처럼.
길에 푹 빠진 소설가
지난달 25일 서울에서 3시간여를 달려 구영동고속도로의 아찔한 구비길을 지나 바우길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강릉시 성산면 대굴령자동차마을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다섯 채의 깔끔한 숙소동과 식사동, 관리사무실이 있는 꽤 큼직한 펜션 단지였다. 사단법인 바우길이 출범 1년 반 만에 벌써 이런 근사한 펜션 단지를 지은 걸까 싶었는데 바우길 사무국장 이기호(51)씨는 “원래 사무실도 없었는데 대굴령마을 주민들이 만든 펜션 단지를 몇 달 전부터 임대해 들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우길의 이사장인 이순원씨가 길의 의미를 그려 간다면 실제 길을 찾아내는 일은 사무국장인 산악인 이기호씨, 외부인의 길 안내는 탐사대장 김역래(61)씨의 몫이다. 이들은 2009년 9월 대관령에서 경포대와 정동진에 이르기까지 총 10개 구간 150㎞의 트레킹 코스를 개척해 바우길로 부르며 강원의 길을 세상에 알려 왔다. 이후 대관령길 세 구간과 주문진 가는 길 등 세 구간이 더해져 지금은 총 16구간 180㎞. 하루에 한 구간씩 걸어도 보름 넘게 걸리는 장대한 규모로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견주는 국내 3대 트레킹 코스가 됐다. 바우길 카페(cafe.daum.net/baugil) 회원은 3,000여명. 매주 토요일 걷기 일정을 올리면 전국 각지에서 회원들이 모여 한 구간씩 함께 걷는다.
그 1년 7개월여 동안 이순원씨는 경기 고양시에서 살면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강릉시로 와서 바우길을 걸었다고 하니 독하다면 독한 열정인 셈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그전까지 등산화 한 벌 없을 정도로 등산이나 트레킹의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글과 길이 닮은 듯 하지만 현실에서 보자면 글 쓰기와 길 내기는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차이만큼 엄연히 다른 영역. 그 역시“등산하거나 걷는 시간에 책 한 줄 더 보는 게 낫지”라고 여겼던 순전한 글쟁이였다. 대표작 ‘은비령’(1997)의 경우도 정작 그는 그 무대가 된 필례약수터 가는 길을 가 보지 않은 채 상상 속에서 그렸고 그의 글로 그 길은 정말 은비령길이 됐다. 그러니까 작가란 몸이 아니라 글로써 길을 만드는 사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어머니와 부인은 “글을 쓰는 아들(남편)이 좋지, 길을 내는 아들(남편)은 싫다”며 바우길 작업을 만류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어머니와 아내가 안티 1호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씁쓸함이 잔뜩 배인 그 웃음의 정체는 뭘까. 양미리 안주에 소주가 몇 순배가 더 돌았지만 대관령의 맑은 공기 덕분인지 정신은 더욱 말똥해졌다. 그가 이렇게 몸으로 길 내기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관 주도를 벗어난 길 만들기
사연은 복잡했다. 올레길 성공 이후 각 지방자치단체에선 너나없이 길 만들기 바람이 불었고 강릉시도 예외 없었다. 길의 스토리텔링과 홍보를 맡아 달라는 강릉시의 제안에 “그동안 고향 이야기를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었는데 고향에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합류했다는 것. 그런데 정작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강릉시와 엇나가고 말았다. 이씨에 따르면 바우길 작업에 참여한 지역 유지들이 길 내는 일을 예산 따먹는 공사로 여겼고 시도 그쪽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일이 틀어지는 순간 발을 빼도 될 법 했을 텐데 이씨는 오히려 ‘누가 정말 길다운 길을 만드는가 보자’는 심정으로 매진했다. “내가 발을 빼는 순간, 바우길 절반엔 데크가 깔리고 인공구조물로 포장될 게 뻔하지. 끼리끼리 나눠먹는 공사판으로 길이 더 망가지는 거지.”
그렇게 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아니 “시의 방해를 받아 가며” 개척한 바우길은 그러니까 큰 돈이 들지 않은, 마을과 마을을 이으려는 정성으로 찾은 자연의 길인 셈이었다. 관과의 갈등으로 마음 고생이 제법 컸을 그는 “이런 일 저런 일 겪어야 재미있지. 관이 개입하지 않아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소나무길 향내에 몸을 맡기고
토요일인 이튿날 예정된 걷기 코스는 강릉시 위촌리 송양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죽헌저수지를 지나 경포대로 이어지는 바우길 11구간(일명 신사임당길ㆍ17km)이었다. 산맥과 바다를 아우르는 바우길 16개 구간 중 11구간은 야트막한 산과 숲과 들을 지나는 전형적 시골길을 지나 강릉시의 유적지가 집약된 오죽헌_선교장_경포대_허균 허난설헌 생가로 이어진 코스다.
출발지인 송양초교는 이씨의 모교.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산골 오지의 학교인데 어쩐 일인지 건물 증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씨는 “아이들이 없어 폐교가 될 상황이었는데 영어특성화교로 지정된 후 원어민교사 덕택에 아이들 영어 실력이 늘었다는 소문이 나 강릉시에서 학생들이 몰려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10시께 송양초교 앞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더니 40여명으로 불었다. 고양시에서 왔다는 일가족과 강원 원주시 속초시에서 온 이들 등 첫 참가자들이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하고 몸풀기 체조를 한 뒤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됐다.
2월 말은 무릎 위의 따뜻함과 무릎 아래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모호한 시절. 눈다운 눈을 보는 것도 아니고 신록의 푸르름을 느낄 수도 없어 여행하기엔 참 딱한 시기지만 차라리 마음을 비운다면 환절기의 미학을 즐길 수도 있다.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아직 피지 않은 풀잎 속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 여전한 것은 소나무였다. 오솔길을 걷는 내내 길 양편으로 쭉 뻗은 소나무 향내로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듯했다.
1시간여 숲길을 걷다 보면 십여 채의 민가가 나오고, 다시 한 시간여를 걷다 보면 마을이 나오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출발과 끝이라는 행로가 없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오가며 생긴 오래된 때묻은 길이었다. 이씨는 “바우길은 예전부터 내려온 길과 옛 사람들이 밟다 묻힌 길들을 찾아 이어 준 것”이라며 “이번 일을 통해 마을이 살아야 길이 산다는 것도 느꼈다”고 말했다. 길을 내고 길을 걷는 이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이 길 속에서 혜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오후 5시께 경포대 인근 허균ㆍ허난설헌 생가에 도착하면서 걷기는 끝났다. 부산에서 혼자 올라온 박영석씨는 “이렇게 오랫동안 눈길을 걸어 보기는 처음이데 그저 행복하다는 말밖에 못하겠다”고 했다. 강릉시 주민인 임지영씨는 “군데군데 가 본 곳은 있었지만 바우길을 걸으면서 우리 고장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됐다”며 “진짜 소나무가 우리 고장의 천혜의 자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일행 중에는 이씨의 여동생도 있었다. 해수(53)씨는 “예전에는 ‘저 사람 왜 걷냐’ 싶었는데 오빠 때문에 걷기를 알게 됐다”며 “차 소리 없이 조용한 길을 소나무만 보고 걸으니까 너무 좋았는데 쫓기며 사는 우리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길이 글을 만들 차례
바우길은 이씨의 입장에선 어쩌면 의도치 않게 발목이 잡혀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기 문학의 원천인 고향에 대한 보답으로 고향의 길이 공사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지켜 내겠다는 집념이다. 올해 초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1996)에서 그는 초교생 아들과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글을 쓸 때 나무를 생각하는 건 과연 내가 쓰는 이 글이 저 푸른 나무들을 베어내 내 책으로 만들어도 부끄럽지 않은가를 생각하는 거란다. 내가 쓴 글을 위해 몸을 바칠 나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 아빠의 마음이란다.”그가 길로 나선 것은 어쩌면 이런 아들과의 약속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관의 예산 지원이 없다 보니 지금까지 바우길 지도 팜플렛도 만들지 못했지만 민간 후원금 등으로 하나하나 보폭을 넓히고 있다. 4월에는 3박 4일 코스의 7O㎞ 에코 울트라 바우길도 개통한다.
그는 지난 1년여의 경험을 통해 관과 지역 유지의 결탁 등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깨달음을 담아 바우길의 개척 과정을 담은 에세이를 집필 중이고, 장편 소설도 쓰고 있다고 했다. 길 위에서 보낸 지난 시간 때문에 자신의 문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그의 글이 없던 길을 만들어 냈다면 이제 길에서 보낸 그의 여정이 다시 글을 만들 차례가 된 것이다.
강릉=글ㆍ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바우길 16개 구간
‘바우’는 강원 지역 사투리로 바위를 가리키는 말. 강원 사람을 ‘감자바우’라고 부르는 데서 따온 말이다. 바우(Bau)는 또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손으로 한번 쓰다듬은 것만으로도 죽을 병을 낫게 하는 여신 이름으로 건강을 염원하는 뜻도 담겨 있다.
바우길 16개의 구간은 백두대간에서 경포대를 아우르다 보니 전형적 등산길도 있고, 산에서 바다로 나는 길, 바다를 따라 걷는 길, 숲과 바닷길을 번갈아 걷는 길 등 다양한 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바닷길을 제외하면 바우길의 70% 가량은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제각각의 길엔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2구간인 대관령 옛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이율곡의 손을 잡고 걷던 오랜 역사의 길이며, 9구간 헌화로는 수로 부인에게 붉은 철쭉을 따 주려다 목숨을 바친 노인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6구간 굴산사 가는 길에서는 단오의 민속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10구간 심스테파노길에는 바우길 개척 과정에서 발견한 천주교 순교지가 있다. 심스테파노는 대관령 동쪽에서 순교한 유일한 성직자인데 강릉시 굴아위에서 신상 생활을 하다 잡혀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과 그가 살았던 마을을 찾아낸 것이다.
현재 바우길엔 이정표가 그다지 많지 않아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는데 초보자는 매주 토요일 소설가 이순원씨가 이끄는 걷기 일정에 참여하면 좋다. 바우길 홈페이지(baugil.org)와 인터넷 카페(cafe.daum.net/baugil)에 매주 일정이 공지된다. 길 정보와 자료, 지도도 이곳에서 구할 수 있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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