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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tory] 감정 노동자들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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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tory] 감정 노동자들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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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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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사원 경력 11년째지만 고객 응대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특히 손님의 욕설과 하대에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조아려야 할 때 '이러다 제 명에 못살지'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오전에 3만원대 립스틱을 사고 시중에서 10만원대인 메이크업 서비스까지 무료로 받은 손님이 저녁에 흥분한 얼굴로 찾아왔다. 이유가 황당했다. "아이섀도를 골랐는데 립스틱을 줬다. 손님을 속이다니 분하다. 어떻게 보상할테냐."손님은 1시간여 동안 소리를 지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백화점이 부과하는 벌점을 각오하고 손님을 고객상담실로 보냈다.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이런 손님조차 웃는 낯으로 대해야 하는 나같은 '감정 노동자'들의 비애를 그들은 알기나 할까.

판매ㆍ고객지원 등 서비스직 종사자(감정 노동자) 10명 중 2.7명이 직간접 고객 대면 서비스(감정노동ㆍEmotional Labor)로 인해 우울증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정부 관련 부처는 서비스산업 확대에만 골몰한 채 대책은커녕 실태 파악조차 않고 있다.

한국일보가 최근 입수한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의 '민간 서비스 노동자 삶의 질 연구'를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비스직 종사자 3,096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후유증 실태를 조사한 결과 심리상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중등도ㆍ고도 우울증 증세가 있는 이들이 26.6%나 됐다. 이는 징계 해직자 중 우울증 환자 비율(28.5%)과 비슷하고, 온종일 운전을 하는 버스 기사(13.3%)보다는 2배나 많은 것이다.

피로도를 묻는 탈진 항목에서도 '고객관련 탈진'(47.34ㆍ5점 척도 조사 후 100점 만점으로 환산)이 육체 피로를 뜻하는'일반 탈진'(54.34) 다음으로 높았고 '업무 탈진'(46.24)이 뒤를 이었다. 이는 덴마크가 240개 서비스 직종을 대상으로 한 탈진 증후군 조사에서 고객 관련 탈진이 가장 높게 나온 간수의 피로도(41.2)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국내 서비스산업 종사자는 1980년 506만 5,000명에서 2009년에는 1,618만 3,000명으로 3배나 늘었고, 전체 취업자 중 비중도 37.3%에서 68.9%로 증가했다. 이처럼 서비스산업의 확대나 종사자 수 급증은 고객과의 대면 시간이 긴 서비스업의 특성때문에 우울증과 같은 감정노동 후유증 증세를 보이는 노동자들의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노동계도 감정노동을 노동 유형의 하나로 인정, 궁극적으론 산재 대상에 포함시키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는 감정노동 개념 도입은 물론 후유증 예방 및 보상 등을 위한 실태 조사나 제도적 개선책 등을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 고객 접촉이 빈번한 기업들도 종업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나 발병을 막을 예방책도 없이 무작정 친절과 미소만 강요하는 형편이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한국경제는 고속성장에 힘입어 제조ㆍ생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됐다"며 "그러나 서비스업이나 종사자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괴리가 발생했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기업들이 종업원들을 다그치는 과정에서 감정노동 후유증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감정노동 (Emotional Labor)

고객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특정한 감정 상태를 연출하는 것이 업무상 요구되는 노동 유형으로, 감정 관리 활동이 직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를 말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1983년 (The Managed Heart)이라는 책에서 항공기 승무원 사례에 초점을 맞춰 처음 개념화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강희경기자 kstar@hk.co.kr

■ 화가 나도 "고객님~" 감정충돌로 가슴 멍든다

특정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도록 강요당하는 감정노동은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서비스연맹) 설문조사에서 보듯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을 야기한다. 따라서 개인의 건강권 보호는 물론 서비스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감정노동 후유증 발생의 원인을 차분히 짚어보고 근본적인 대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감정노동은 서비스산업의 독특한 특성에서 기인한다. 즉 상품 판매와 계산, 고객 상담 등의 업무를 하는 서비스 직종 근로자는 고객과 대면하며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본래 감정과 노동자로서의 감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조화로 강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더구나 소비자가 시장을 통제하게 된 이후 대다수 기업들이 고객 제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그 책임을 노동자의 '웃음'에 전가하면서 노동자가 느끼는 감정 부조화의 비극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기업은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고객에 대한 무조건적인 친절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친절 강화 교육 등으로 감정노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감정노동에 따른 감정의 부조화와 이로 인한 노동자의 정서적 소진은 비정규직의 확산 추세와 그들의 열악한 지위 및 근무 환경과 맞물려 있다. 지난해 8월 기준 국내 임금근로자 1,704만 8,000명 중 비정규직은 568만 5,000명(33.3%). 이중 제조업의 비정규직은 전체 임금 근로자(346만 6,000명)의 16.7%(57만 9,000명)인데 반해 도ㆍ소매업의 비정규직은 전체 임금 근로자(189만 3,000명)의 33.4%(633만명)에 달한다. 또 도소매 및 음식ㆍ숙박업종의 여성 노동자는 전체 여성 노동자의 30%에 이른다. 서비스 직종의 비정규직 및 여성 노동자 비율이 확대될수록 감정노동 후유증은 더 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비스 산업 현장의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의 과소평가 분위기 때문인지 정부와 기업은 서비스직 노동자의 감정 부조화를 개인 문제로 치부하며 제도적 대책 마련을 회피하는 분위기다. 근로기준법, 산업재해보상보호법, 산업안전보건법 등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고 있다지만 제조업 중심의 산업 분류를 토대로 삼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이로 인해 외견상 쉽게 드러나지 않는 감정노동 후유증을 업무상 재해의 판단 기준으로 삼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기업은 전화 친절도를 점수화한 친절 평가를 실시하거나, 고객을 가장해 기업과 매장 직원의 친절도를 알아보는 '미스터리 쇼퍼'같은 모니터링 제도를 활발히 운영하면서도 종업원의 정신 건강을 고려한 심리상담 서비스 등은 외면하고 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의 감정노동으로 인한 감정의 부조화가 일상화하고 있지만 정부와 사회가 이를 방치하고 있다"며 "고객과 기업의 인식 전환, 정부의 제도적 개선 노력을 통한 감정노동의 가치 인정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 생떼…모욕…성희롱 다반사

"야 이 XX야, 이 곰팡이 안보여?"

지난주 서울의 한 대형 마트. 30대 남성이 떡국용 떡에 곰팡이가 생겼다며 욕설과 함께 떡 봉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던 40대 여성 판매원 A씨는 조심스럽게 "고객님, 떡을 냉장고에 보관하셨죠?"라고 물었다. 남성은 "겨울이라 밖에 뒀는데, 뭐가 문제냐"고 받았다. 날짜를 따져 보니 열흘 이상 떡을 상온에 방치한 것이다.

A씨는 화가 치밀었지만 자세를 가다듬고 환불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남성은 "언론사에 제보하겠다"며 목청을 더 높였다. 그는 서너 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5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고서야 돌아갔다. A씨는 "이런 손님이 어쩌다 나타나야 '희한한 사람 다 있다'생각할 텐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런 일을 당하니 마트에는 이상한 사람만 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매일 '오늘도 무사히'라고 기도하며 일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계산원 판매원, 호텔이나 음식점의 종업원 등 감정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미소 뒤에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통이 숨어 있다. 제품에 하자가 있다며 화를 내며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환불을 요구하거나 보상을 바라는 고객은 부지기수고, 제품 구입 후 마음이 바뀌자 수 차례 배송과 반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모욕적인 언사에 성희롱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고통조차 가슴에 묻고 미소로 고객을 맞아야 하는 게 감정노동자들의 슬픈 운명이다.

백화점에서 가구를 판매하는 윤모(51)씨는 얼마 전 '진상' 고객에게 걸렸다. 67만원짜리 식탁을 배송했는데 고객이 사소한 하자를 문제삼아 교환을 요구했다. 일단 반품 조치하고 새 제품을 재배송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품 다리와 패널이 완벽하게 맞지 않아 틈새가 생긴다며 교환을 요구했다. 윤씨가 온갖 항의를 들으며 배송과 반품을 반복한 것만 10여 차례. 배송팀과 함께 제품을 들고 고객 집을 직접 방문해 식탁 위에 널브러진 반찬통까지 정리해 냉장고에 넣고 새 제품 설치와 걸레질까지 해주고 온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윤씨는 허리 굽혀 사과해야 했다. 그러나 고객은 끝내 환불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윤씨는 "처음부터 환불을 요구하면 될텐데 끝까지 판매원을 괴롭히며 물고 늘어지는 손님이 있다"며 "백화점이나 고객 모두 판매원에게만 서비스와 판매 책임의 짐을 모두 지우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성희롱까지 당하는 사례도 있다. 부산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이모(40)씨는 몇 해 전 밤 늦게 호텔 바에서 주문을 받던 중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손님 한 명이 다리에 손을 갖다 댄 것. 이씨가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며 화를 냈지만 손님은 술을 다 마시고 바를 떠날 때쯤에야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지금도 당시의 굴욕감과 당혹감이 생생하다는 이씨는 "손님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를 하려면 직장을 그만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감정 노동자들의 감정은 세월에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처럼 감정 노동자들은 인간적 모멸, 모욕에도 참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하루 11시간 근무에 월80만~90만원(대형 마트 계산원 기준)의 박봉이지만 그나마 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유영자 홈플러스 노조 지부장은 "대부분의 감정 노동자가 저임금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아 늘 회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며 "정신적 스트레스, 우울증 증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어도 상담 한 번만으로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무서워 혼자 속으로만 삭이며 넘어가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강희경기자 kstar@hk.co.kr

■ 고객은 왕, 직원은 종 언제까지…

지난해 미국에서 발생한 '분노의 탈출'사건의 주인공 스티븐 슬레이터(38). 저가 항공사 승무원인 그는 이동 중인 항공기에서 짐을 꺼내는 승객에게 주의를 줬다가 욕설을 듣자 승객에게 욕을 퍼붓고 맥주를 마신 뒤 비상탈출 장치를 이용, 항공기 밖으로 빠져나간 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슬레이터는 유죄 판결에도 불구, 동정 여론 덕에 징역형은 면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항공기 승무원의 직무상 스트레스를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승객의 안전을 위협한 행동에 비난이 더 높지 않았을까.

전문가들은 "수치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나라 감정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는 선진국보다 훨씬 높은 편"이라고 말한다. 그 원인으로 우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 사농공상으로 신분을 구분하던 전근대적 사고방식 및 그로 인한 서비스 노동자 하대 문화를 꼽고 있다. 여기에 서비스 노동자들은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고객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천민 자본주의적 인식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국내 서비스산업의 고속 압축 성장과도 무관치 않다. 유럽은 서비스에 대한 가치 개념이 정착해 있고, 서비스 판매자와 구매자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비스 문화에 대한 논의조차 전무하다 보니 '서비스=공짜'라는 인식에서 보듯 왜곡된 서비스 문화가 판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기업들이 오랜 기간 '고객은 왕이다'라는 구호를 금과옥조처럼 사용하면서 과잉 서비스를 요구하는 고객을 양산한 측면도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올바른 서비스 소비 문화 정착을 위한 소비자 운동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진주 이화여대 교수는 "과잉 서비스를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소비자들도 많다"며 "패밀리 레스토랑 종업원들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던 모습이 소비자들의 거부감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소비자들이 먼저 기업에 적정 수준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감정 노동자들과 상생하는 소비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강희경기자 k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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