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 참사를 빚고 있는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우리 교민들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전세기 KE9928 편이 도착한 26일 밤 인천국제공항. 1층 입국장 환영홀로 들어서는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도망치듯 리비아를 떠나면서 두고 온 집과 사무실, 건설현장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전세기에는 건설 근로자와 교민 235명, 외국인 3명 등 238명이 탑승, 급유 차 로마를 경유해 이날 오후 8시3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리비아를 탈출한 이들이 전하는 현지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지난해 3월부터 리비아 자위야 신한건설 현장에서 근무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권용우(50)씨는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탱크가 도로 위를 지나다니고 기관총도 무자비하게 발포돼 무서웠다"며 "깡패로 둔갑한 현지인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길거리에는 시신이 나뒹굴었다"고 말했다. 권씨는 또 "회사가 고용한 방글라데시 등 제3국 근로자 2,500여명이 자기들의 안전을 책임져 줄 때까지 (한국 직원을) 보내 줄 수 없다고 막았는데, 협상을 해서 겨우 일부만 이렇게 빠져 나왔다"고 했다.
무역업 등을 하며 트리폴리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했다는 김승훈(45)씨도 가족이 겪은 일을 생생하게 쏟아냈다. "도둑으로 변한 현지인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집으로 들이닥쳤다. 리비아 이웃의 도움으로 피해는 겨우 모면했다"는 것이다. 그는 집, 사무실, 자동차 등 5억여원의 재산을 리비아에 두고 부인과 두 아들, 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현지 건설현장에서 트리폴리공항까지 가는 길도 험난했다. 건설근로자 구자경(48)씨는 "25인승 버스에 32명이 짐짝과 뒤섞여 타고 갔다"며 "공항까지 가는 동안 4차례나 검문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카메라, 휴대폰 등을 모두 뺏긴데다 일부는 여권까지 압수 당해 결국 비행기를 타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증언했다.
이들에 따르면 탈출구로 변한 트리폴리 공항의 상황은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구자경씨는 "공항에는 한국인과 이집트인, 튀니지인 등 인파가 계속해서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새통이었다"고 말했다. 리비아에서 8개월간 체류했다는 김현철씨는 "공항 안팎에서는 항공편이 없는 사람들이 이불을 깔아놓고 노숙자처럼 지내고 있다"며 "다들 빨리 리비아를 떠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영종도=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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