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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tory] 강남 좌파,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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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tory] 강남 좌파, 누구냐 넌!

입력
2011.02.2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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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부와 진보는 오랫동안 섞일 수 없는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었다. ‘부유한 진보주의자’는 그 희귀성 때문에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 등식에 균열이 일고 있다. 최근 빈번한 ‘강남좌파’의 회자가 그 예다. 강남좌파는 강남이라는 특정 지역에 한정된 부류가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부를 축적했음에도 진보적 사고를 갖춘 이들의 독특한 성향을 ‘강남’과 ‘좌파’라는 대척점에 선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왜, 언제부터 자신의 이익과 상반된 진보적 이념을 좇게 된 것일까.

한국일보는 강남좌파의 삶과 사고를 들여다 보기 위해 자칭, 타칭 강남좌파로 분류되는 20세 이상 남녀 10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강남좌파의 특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낼 수 있도록 설문조사 대상은 진보 진영의 기반이 가장 취약한 강남3구(강남ㆍ서초ㆍ송파구)에 집을 소유한 이로 한정했다.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강남좌파의 특성을 갖춘 가상의 ‘나’를 소개한다.

전동차가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을 지날 때, 페이지를 넘긴 새 챕터의 굵은 활자가 눈길을 잡아맸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말부터 읽기 시작한 장하준 교수의 중 13장이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인 84년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8학군 중학교를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덕분인지 제법 괜찮은 서울 상위권 대학을 다녔고, 시위나 학회(동아리) 세미나에 끌려 다니며 모종의 윤리적 의무감을 내면에 장착했다.

나는 7년 전 결혼했다. 역삼동 109㎡ 넓이의 아파트는 부모님이 예전에 내 몫으로 마련한 것이다. 광화문 회사 근처에 집을 얻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내나 나나 강남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척의 백화점 영화관 공연장 전시관, 즐비한 레스토랑과 카페…. 몸에 밴 고급 취향이 발길을 붙들었다. 또 아이가 태어나 괜찮은 영어유치원에 다니려면 어차피 강남으로 와야 한다. 사실 강남 친구들을 만나면 말도 통하고 마음도 편하다. 아이에게도 강남 네트워크를 물려주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이런 욕망이 한때 ‘노빠’였던 내 정치의식과 충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 출범 때부터 예상한 것이지만 마치 시대의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놓은 듯 정부의 비민주적 행태는 인터넷을 볼 때마다 개탄을 자아낸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때는 대학 때도 억지로 끌려다니던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케 만들더니, 인터넷에 정부에 불리한 글을 올렸다고 ‘미네르바’를 구속하지 않나,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이르기까지 점입가경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자본주의 체제의 승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 가혹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을지 늘 불안하다. 성과 목표는 달성이 힘든데, 부장, 이사, 상무? 다 남의 얘기일 뿐이다. 그저 좀 풍족하게 사는 노동자, 그것이 내가 가진 계급의 숨겨진 상처다.

얼마 전 술에 취해 불렀던 대리운전 기사는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쉽지 않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취기가 가셨다. 피자 배달원이 헐떡이며 가져온 식은 피자가 그의 월급에서 감해지는 조건으로 공짜로 제공된다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아마 먹지 않았을 것이다. 불매운동이라고 했을 것이다.

우린 모두 고속 러닝머신 위에 올려져 있다. 죽도록 뛰어봐야 제자리다. 세상은 달라져야 한다. 경쟁만 강요하는 승자독식의 이 지독한 양극화 시스템에서 승자란 없다. 겉멋 든 ‘강남좌파’라고 비아냥거려도 좋다. 적어도 ‘강남꼴통’보다는 낫지 않은가.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민주화 체험 진보적 성향…"그들만의 보수 염증난다"

서울 강남구에서 대입 학원을 운영하는 50대 A씨. 그는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당시 진보 성향의 곽노현 교육감을 적극 지지했다. 간접적으로 선거운동도 도왔다. 주변 사람들이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면 사교육 규제가 심해져 학원 운영이 어려워진다"고 말렸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A씨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사교육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라고 말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쌓아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A씨처럼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강남좌파'.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이념 지형도에 입체감을 더하며 대중적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남좌파라는 새 부류가 하나의 실체로서 외연을 넓힐 수 있게 된 배경과 동인은 무엇일까. 그들은 정치적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보수 정치에 대한 실망이 자양분

강남좌파는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는 동안 강남좌파로 분류될 만한 인물, 강남좌파의 활동으로 평가받을 만한 현상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남좌파에 대한 최근의 회자는 보다 더 광범위하고 현시적이다. 원인이 무엇일까.

스스로를 강남좌파로 분류하며 일련의 저작으로 진보 담론을 확산시킨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유층의 진보 영토가 넓어지는 현상은 보수 정치권이 부유층의 눈높이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능력없는 보수 정치에 실망하고 특정 계층만 대변하는 현 정부에 낙담한 식견 높은 젊은 부유층이 극심한 사회 양극화에 대한 일종의 계급적 자책을 느끼며 점차 진보적 색채를 강하게 띠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6ㆍ2 지방선거 때부터 불기 시작한 무상급식 등 보편적 복지 문제가 정치권 등 보수ㆍ진보 진영간 치열한 논쟁거리로 부상한 것과 때를 같이 해 진보적 이념, 또는 진보적 담론에 가까운 내용을 다룬 서적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도 강남좌파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 법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조 교수의 <진보 집권 플랜>, 그리고 최근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은 어느 때보다 진보적 담론을 무성하게 만들어 강남좌파의 정체성 공고화와 세 확산에 촉매 역할을 했다.

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진보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 것도 강남좌파 확산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민주화 경험한 전문직군이 동력

강남좌파의 중심적 인물들이 3,40대부터 50대 초반에 이르는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80년대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직간접으로 체험했던 이들이 경제적 토대를 갖추고 사회의 중추적 세대로 성장한 뒤에도 학창 시절 내재화한 진보적 이념에 터잡아 강남좌파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 지역에서 진보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이른바 486세대로 분류되는 강남좌파들의 역할과 무관치 않다. 일례로 서울 강남을 지역구의 경우, 2007년 대선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 득표율은 1.3%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듬해 18대 총선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의 득표율이 10.1%로 자유선진당 후보(7.4%)를 앞질렀다. 신언직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은 "대학 시절 87년 6월 항쟁 등을 체험한 40대 이상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이 강남 3구에서 진보의 토양을 두텁게 형성해 가고 있다"며 "디지털 네트워크에도 능숙해 정보 접근력이 강한 이들이 조국 교수와 같은 강남좌파의 성공 사례를 보며 진보적 태도를 더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같다"고 말했다.

강남좌파, 유의미한 세력 될까

강남좌파의 저변 확대는 내년 총선과 대선 정국에서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미칠까. 현재로선 예상하긴 힘들지만 보수의 영원한 요새처럼 여겨졌던 중산층 이상 계층에서 진보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현상을 정치권이 외면하거나 방치하진 못할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또 이들이 우리 사회에 이념적 완충지대를 만들어 '못사는 사람은 진보, 잘사는 사람은 보수'라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던 이념 지형도에 큰 변화를 몰고올 수도 있다. 신언직 위원장은 "무상 복지 등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첨예한 논쟁이 내년에도 이어지면 강남좌파의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라며 "한나라당에 맞설 야권 연대를 모색하게 되는 과정에서 강남좌파의 역할은 무궁무진하게 발휘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남좌파가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으로 집결하고 성장할 만한 공간은 매우 좁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설령 강남좌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라도 눈앞의 이익을 포기한 채 진보적 성향을 일관되게 표출할 만한 이는 많지 않은 만큼 보수 정당이 이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과 비전을 제시할 경우 얼마든지 현실주의로 선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발견>의 저자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자녀 교육 스트레스 등으로 보수 정권을 향한 강남좌파의 반감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반감이 정치적, 물리적 공간에서 표출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강남좌파의 결집력을 높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같다"고 말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

■ 78% "부유세·무상급식 찬성"

강남 3구에 주택을 보유한 중산층 이상 시민들 중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강남좌파'들은 진보적 이념을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꼽았다. 이들은 양극화 현상이 심화할수록 강남좌파의 저변은 더 확대될 것으로 내다 봤다. 한국일보는 최근 우리 사회 담론 중 하나로 부상한 '강남좌파'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2월 11일부터 일정 요건을 갖춘 성인 남녀 109명을 상대로 개인영역과 이념영역으로 나눈 39개 문항의 설문을 실시했다.

개인의 이익보다 진보적 신념 우선시

진보적 이념을 지지하는 이유(복수응답)로 39.4%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꼽았다. '보수 정권 및 전반적 사회 보수화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답한 사람도 33%에 달했다. 이들은 대학(41.3%)과 중고교(13.8%) 시절에 진보적 이념을 처음 접했으며, 관련 서적 탐독이나 강의 수강,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한 학습(56.9%)이 진보 이념 수용의 주된 통로였다.

이들은 부유세, 종합부동산세 등 부유층의 이익과 직결된 사안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에 자신의 이익보다 진보적 신념을 좇는 의견을 나타냈다. 응답자 중 78%가 부유세 도입에 찬성했고,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는 66.9%가 '존치ㆍ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7.3%에 불과했다. 특히 이 같은 성향은 4,50대가 더 두드러졌다. 40대 응답자의 83.3%, 50대의 85.7%가 부유세 도입에 찬성했고, 특히 50대의 85.6%는 종합부동산세 존치ㆍ강화에 찬성했다.

지지 정당은 민주당 33명(30.3%) 진보신당 20명(18.3%) 민주노동당 11명(10.1%) 국민참여당 9명(8.3%) 순이었고 지지 정당이 없다는 응답자도 26명(23.9%)에 달했다. 진보 성향이면서 한나라당(6명ㆍ5.5%) 자유선진당(2명ㆍ1.8%) 지지자도 8명(7.3%)이나 됐다.

"강남좌파의 진보적 성향은 허위 의식과 지적 허영의 발로"라는 비판에 대해 응답자의 57.8%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고 42.2%는 비판을 수긍했다. 특히 20대 응답자 26명 중 16명(61.4%)이 '그런 면이 있다'고 답해 주목된다.

나이 많을수록 진보적 색채 더 강해져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지만 강남좌파들은 달랐다. 설문조사 결과 강남좌파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진보적 성향이 상대적으로 더 강했다. 이 같은 결과는 나이가 많은 층이 젊은 층보다 보수적인지, 아니면 진보적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설문 대상자들의 연령과 답변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나온 것이다.

장년층이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경향은 교육을 통한 계층 변동을 경험한 세대답게 교육 이슈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특목고ㆍ자율고 같은 수월성 교육의 확대 정책에 대해 50대는 57.1%가, 20대는 46.1%가 반대했다. 또 학원 교습시간 제한 등 사교육 규제에 대해서도 50대는 71.4%가, 20대는 46.1%가 찬성했다. 기부금 입학제에 대해서도 50대와 20대의 차이는 비슷한 경향을 보였고, 취업서류 학력난 폐지도 연령이 높을수록 찬성 비율이 높았다.

노동 문제에서도 진보적 성향은 20대보다 4, 50대가 더 뚜렷했다. 공공부문 노조 파업, 공무원 및 교원의 정당 가입에 대해서도 젊은 층보다는 중년층 이상 세대의 지지세가 더 높았고, 사형제 폐지, 교내 체벌 금지 같은 인권 이슈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국적, 병역 이슈 등에서는 달랐다. 취업시 군필자 가산점제 항목에서 4,50대의 찬성률이 20대보다 높았지만, 원정출산이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체복무제 도입에는 4,50대가 강하게 반대했다. 무상급식ㆍ무상의료 등 보편적 복지 제도 도입에 대해서도 4,50대의 부정적인 비율이 높았다.

교육 때문에 강남 살지만 사교육 규제 지지

가족 구성원 성향에 대해 35.8%는 '나만 진보적'이라고 답했다. 42.4%는 '형제 자매 배우자 등 또래 구성원은 진보적'이라고 했고'부모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전체가 진보적'이라고 답한 비율은 16.5%로 나타나 정치 성향 결정에 부모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강남 거주 목적에 대해 25.8%가 '교육환경'을 꼽았다. 하지만 사교육 규제에 대해서는 66.1%가 지지 의사를 나타냈다. 특히 40대(79.1%)와 50대(71.4%)의 사교육 규제 찬성 비율이 높았다. 반면 20대는 53.8%가 사교육 규제에 반대해 대조를 보였다.

현안별로는 무상 급식 등 보편적 복지 정책 찬성이 78%, 공공부문 노조 파업 지지가 58.7%,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이 78% 등으로 나타났으며 기부금 입학제는 반대가 65.1%였다.

설문 응답자는 남성이 67명(61.5%) 여성이 42명(38.5%)였으며, 연령별로는 20대 26명(23.9%), 30대 52명(47.7%), 40대 24명(22%), 50대 7명(6.4%)이었다. 출신지는 서울이 68명(62.4%)으로 가장 많고 호남(16명ㆍ14.7%) 영남(12명ㆍ11%) 순이었다. 최종 학력은 대학(69명ㆍ63.3%)과 대학원(33명ㆍ30.3%)을 졸업한 고학력가 대부분이었다.

현재 소유한 주택을 자력만으로 장만한 사람은 19명(17.4%)에 불과했고 부모로부터 증여 받거나 일부 도움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 경우가 전체의 78%에 달했다.

박철현기자 karam@hk.co.kr

■ 대표적 인물 누가 있나

강남좌파는 보수 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진보 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다. 정치적ㆍ이념적으론 좌파지만 행동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일견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2006년 5월 <인물과 사상>에서 강남좌파를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 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정의하면서 "보수언론이 노무현 정권을 공격하려는 혐의로 읽히지만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강남좌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자 강남좌파를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낸 첫 시도였다.

강남좌파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의 1997년 대선 출마, 2000년 민노당 창당 및 대표 취임 과정에 정치ㆍ사회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지방선거 직전 공개된 노회찬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첼로 연주 사진은 강남좌파 이미지를 대중에 인식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는 이 사진을 표지에 담은 책에서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가 그의 꿈 중 하나라고 밝혔고,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를 받아 언론 칼럼에서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어도 소질만 있다면 아마추어 첼리스트가 될 수 있는 사회는 한낱 꿈이 아니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톨레랑스(Toleranceㆍ관용) 개념을 일반화해 노블리제 오블리주(Noblesse Obligeㆍ사회지도층의 지위에 걸맞은 책임)를 중시하는 강남좌파를 부각시켰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에는 강남에 물적 기반을 둔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검찰 개혁으로,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수석이 반 자유무역협정(FTA) 운동으로 강남좌파의 상징적 인사로 떠올랐다.

현 정부 출범 후 강남좌파는 광우병 사태와 촛불 집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을 거치며 보수 권력과 대칭점을 형성해 가고 있다. 활발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조국 교수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건강보험을 통한 무상의료 실현에 앞장서는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강남 지역에서 진보정당의 텃밭을 일구고 있는 신언직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 등이 강남좌파의 주요 인물이다. 세대간 불균형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도 한 때 강남좌파(그는 이 말이 싫어 강북으로 이사했다)로 불렸고, 영화감독 봉준호ㆍ박찬욱씨도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강남좌파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佛·英·美선 "캐비어·샴페인·리무진 좌파" 불려

진보주의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을 일컫는 다채로운 용어들이 사용돼 왔다. 영국에서는 런던 북부의 부촌 햄스테드 지명에서 따온'햄스테드 리버럴(Hampstead Liberal)'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이곳 부자들이 노동당에 투표하는 행태를 비꼬아 보수주의자들이 지어 쓰던 말이다.

"우리가 따뜻한 응접실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히며 사회주의에 관한 잡담을 할 때, 바깥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쓴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글에서 유래한 '샴페인 사회주의자'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미국에서는 부자 좌파를'리무진 리버럴'이라고 부르는데, 아르마니 수트를 즐겨 입는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 정치인부터 조지 클루니 등 영화배우에 이르기까지 저변이 넓다.

프랑스에서는 철갑상어알을 먹으며 사회주의를 논한다는 의미로 부자 좌파들을 '고슈 카비아'(캐비어좌파)라고 부른다.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샤도네이 사회주의자'라는말을 쓴다. 구찌 사회주의자, 살롱 좌파, 래디컬 시크등 변주의 목록은 끝이 없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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