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릇파릇 황토 보리밭… 봄은 땅 밑에서 솟아나고
전남 강진만에 섰다. 드넓은 갈대밭 위론 여전히 찬바람이 불어댔다. 백조라 불리는 큰고니떼가 남아있는 것을 보니 강진만의 겨울은 아직 떠나지 않았나 보다.
마량항으로 가는 도중 바닷가 언덕에서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밭을 만났다. 붉은 황토밭 위로 초록이 곱게 물든 보리밭이다. 언 땅 뚫고 솟아난, 유독 매서웠던 지난 한겨울을 견뎌낸 새싹이다. 찬바람의 끝자락에서 만난 봄빛이라서인지 이제 검지 정도 길이의 보리순의 초록이 울긋불긋한 꽃밭보다도 화사하게 느껴졌다.
읍내로 들어서 한 음식점에서 보릿국을 청했다. 오래지 않아 말간 된장국에 청청한 보리순 둥둥 떠있는 보릿국이 나왔다. 국물 한 수저를 떠 입에 넣었는데 이 향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상을 마주한 강진 토박이에게 무슨 맛이냐 물었더니 "흙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느냐" 되묻는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분이 옆구리를 찌르며 "무슨 흙내가 난다고 그러냐"구박을 해댔다. 아니다.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내 입에서도 흙의 기운이 느껴졌다. 역겹고 이질감 나는 흙냄새가 아닌 구수한 땅의 기운이다. 겨우내 얼어있다 이제 지심을 되찾은 그 땅의 기운 말이다.
보리밭을 거닐 때였다. 황토밭은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싹이 올라오며 함께 땅을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스폰지처럼 부드러운 보리밭은 봄의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보릿국 속 보리순에는 얼었다 녹은 땅의 봄의 기운이 담겨있다.
보리순을 씹어보니 부추보단 억세다. 싱싱한 초록의 보리순에서 겨울을 이겨낸 강인함을 느낀다. 푸성귀가 귀한 요맘때 보리순은 그 초록의 갈망을 채워준다. 실제 보리순에는 어느 채소보다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시금치 양배추 케일 등에 비교해 섬유질 비타민 미네랄 등이 수 배 이상 포함돼 일본에서는 이를 가루나 즙으로 즐겨먹기도 한다. 옛 어른들이 보리순을 그냥 푸르다고만 해서 뜯어 먹었던 것이 아니다.
신안이나 목포 영암 등지선 홍어애국에 보리순을 넣어 먹는다. 애는 어류의 간에 해당하는 내장이다. 조금 삭힌 홍어애를 넣고 끓인 국은 막힌 코를 뻥 뚫리게 해주는데 술꾼에겐 최고의 해장국이다. 이 홍어애국과 보리순은 찰떡궁합이다. 많은 홍어애국 전문집들이 2월에 일 년치 먹을 보리순을 뜯어다 보관한다.
보릿국을 단품 메뉴로 내놓은 식당은 거의 없다. 강진군청 앞 남문식당(061-434-1012) 등 강진의 이름난 한정식집이나 백반집들은 그 때에 맞춘 메뉴를 준비하는데 요즘 제철을 맞은 보릿국을 많이 내놓는다.
보릿국으로 봄을 흡수했다면 이젠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의 땅을 둘러볼 차례. 강진만의 다른 이름은 구강포다. 탐진강을 비롯해 아홉 곳의 물길이 모여드는 만이다. 지금 구강포에는 3월초에 떠날 큰고니 800여 마리가 앉아있다. 강진만은 전국 최대의 큰고니 도래지다.
강진읍내엔 다산 정약용이 처음 강진에 와서 머물렀던 주막집, '동문매반가'가 복원돼 있다. 다산이 묵었던 주막집 골방은 그가 이름 지었던 대로 '사의재'란 현판을 달았다. 이 주막집 노파는 다산이 처음 강진에 유배왔을 때 유일하게 따뜻하게 받아준 이로 전해진다. 절망에 빠져있던 다산은 노파의 "그냥 헛되이 사시려는가. 제자라도 길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듣고 스스로를 추렸다고 한다. 다산은 사의재에서 <경세유표> <애절양> 등을 지었다. 복원된 주막에선 주안상도 내놓는다. 애절양> 경세유표>
강진읍 바로 아래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는 큰 스님을 여럿 배출한 도량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강진만을 품은 경관은 호쾌하다. 절 바로 옆은 300~500년 된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하늘을 덮은 동백숲이다. 이곳 동백은 3월 넘어야 절정을 이룬다. 동백숲에서 산허리를 따라 오솔길을 넘어가면 다산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이다. 다산의 강진유배 18년 중 10년을 머물던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을 펴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강진 병영마을은 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자리했던 군사도시다. 한때 사람과 물자가 집산하면서 상업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마을 한복판에는 높이 2m가 넘는 돌담길이 있다. 담이 높은 이유는 말 타고 다니는 병사들로부터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함이다. 마을 돌담의 이색적인 지그재그식 빗살무늬는 <하멜표류기> 의 주인공인 하멜에 연유한다. 하멜 일행은 이곳 전라병영서 7년을 살았는데, 그때 잡역을 하면서 네덜란드식 돌담을 전수해줬다고 한다. 하멜표류기>
강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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