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전, 서울 마포경찰서. 차를 세운 뒤 그 안에서 그는 몇 시간을 기다렸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타 들어가는 마음에 한숨이 수백 번도 더 나왔다. 오후 7시께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그는 간신히 여유를 되찾았다.
"진실은 꼭 밝혀집니다. 범인의 살인 행위를 법이 확인해 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지난달 14일 출산을 한 달 앞둔 박모(29)씨가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한 차례 구속영장을 기각 당하는 과정을 거쳐 이 사건 수사 착수 40여일 만에 박씨가 의사인 남편 백모(31)씨에게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지난 24일은 경찰이 백씨를 범인으로 보고 살인 혐의로 신청한 구속영장에 대해 법원이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숨진 박씨의 아버지(58)는 그날 차 안에서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법원은 백씨 구속을 결정했다.
사흘 후인 27일, 아버지 박씨를 만났다. 이 사건이 한국일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딸의 죽음이 그냥 묻혀 지나가지 않고 사건의 의문점들에 대한 경찰의 수사를 촉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건 발생 이후 그는 항상 그런 태도였다. "제 말 한마디가 상대에게 빌미를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재판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저는 딸에게 죄인이 되는 거지요."
물론 그런 조심스러움과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은 별개였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한 사고사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딸의 시신과 사위의 얼굴에 난 상처 등을 보고는 '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난 사위 백씨의 살인 혐의의 증거는 그의 믿음의 강도를 키웠다. "(사위가) 범인이 아니라면, 범행을 부인하기만 할 게 아니라 떳떳하게 딸을 죽인 사람을 잡아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라는 생각이 더해지자 그의 의문은 확신이 됐다.
박씨는 사실 "(사위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 '싸웠니'라고 물었을 때 '일방적으로 당했어요'라는 답을 들은 순간부터" 이미 판단을 내렸다고 했다. 사건 당일 사위가 "장례를 치르자"며 딸의 시신을 자신이 일하는 병원으로 옮기려 했을 때 박씨가 극구 반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경찰이 '괜찮다'고 해 허락을 하긴 했지만, '혹시나 시신에 어떤 조작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스터리' 혹은 '미제(未濟) 사건'이란 말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 말을 들으면 가슴이 다 떨립니다. 내 딸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여전히 의심을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어요. 경찰의 수사 결과는 누가 범인인지, 엄연한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지 않나요? 이를 무시한 채 '미제' 운운한다면 딸을 가슴에 묻은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는 사건 발생 3일 전, 그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딸이) 퇴근길에 잠시 들렀는데 자고 가도 될 것을 굳이 가겠다고 하더군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어요. 딸애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박씨는 "진실을 밝혀달라"고 했다.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 동안 정확히 10번 반복한 말이었다. 그는 3월 시작될 1심 재판에서 진실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다. 기자가 미제로 남은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 등을 예로 들며 "혹시 다른 결론이 날 수도 있다"고 하자 그는 깊은 숨을 토해내더니 낮지만 단호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남상욱 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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