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이라는 말은 언제나 짠하다. 금의환향이든 탕자의 귀환이든, 떠남과 돌아옴 사이의 떠돎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귀향은 끝까지 가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일 터, 목표가 무엇이었건 간에,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건 버렸건 간에, 모든 것을 걸었을 그 외롭고 치열한 시간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혜초(慧超)가 왔다. '1,283년 만의 귀향'이란다. 구법(求法) 열풍이 불었던 8세기, 청년 혜초는 당나라로 길을 떠났다. 723년, 장안에서 인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와 불공 밑에서 배우다가 그들의 권유로 구법 여행에 올랐다.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다섯 천축국(인도)을 순례하고, 서역으로 넘어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고, 둔황을 지나 장안으로 돌아오는 4년여의 대장정이었다.
그 4년여 간 40개국을 아우르는 바닷길 사막길 2만여km의 여행 기록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이다. 우리나라 최초의'세계인'이 쓴 최초의 세계 여행기, 8세기 인도 및 서역의 종교와 문화, 풍습에 관한 최고 자료 등, 수사가 화려할수록 그 유랑의 역사는 더 쓸쓸해진다. 둔황의 막고굴 17호 장경동(藏經洞)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초에야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 Pelliot)가 이끄는 중앙아시아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고,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의 귀중본이 되어 있어 모국으로의 귀향은 기약이 없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까. 최초로 나들이에 나선 <왕오천축국전> 을 국립중앙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전에서 만났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27행 총 5,893자라는데, 결락(缺落) 부분을 감안해도 대장정의 기록으로는 턱없이 짧다. 여행의 낭만적 소회가 담기지 않은 대신, 간결한 문장과 단정한 필치 속에 그의 진지한 구도 정신과 결기가 오히려 빛난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죽음의 사막을 오직 두 발로 걷고 또 걸었을 그를 떠올리자니 소박한 문장의 행간에서 길 위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읽히는 듯도 하다. 몇 편의 오언시에 드러난 그리움은 그래서 더 애잔하다. 왕오천축국전>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들리지 않는구나/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남의 나라 땅 끝 서쪽에 있네/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장안에 정착하여 불공의 제자가 된 그는 본격적인 밀교 연구에 나서 이름을 떨쳤지만, 신라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귀향은 어쩌면 지리적 국경을 넘는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 심장이 간절히 원하던 그 모습에 대한 그리움'(베른하르트 슐링크)이 귀향의 궁극이라면 그의 귀향은 영원한 구법의 길이었을까? 그는 마침내 간절히 원하던 그것에 닿았을까? 부디 그랬기를 빈다.
모험심과 열정 따위는 접어둔 지 오래, 더 이상 삶이 신비롭지도 청춘이 부럽지도 않다고 생각하던 요즈음이었다. 그런데 <왕오천축국전> 의 묵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먼 길, 그 아득한 시간, 광활한 공간이 나를 부추기기 시작한다. 둔황, 누란, 바라나시... 왕오천축국전>
"길은 살아 있는 꿈이다/꿈꾸는 자의 꿈에서/길은 비단실처럼 살아서 나오고/그 길 위에서 꿈은 꿈틀꿈틀 부화한다"(정일근,'아시안 하이웨이'에서). 어쩌면 나도 어떤 귀향을 다시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깨달은 자의 흔적이 나를 꿈꾸게 한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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