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4,000여명이 살던 산성도시였다.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광주, 강화, 수원, 개성에 설치한 4개 유수부(행정ㆍ군사 중심 도시) 중 광주유수부가 있던 곳이다. 왕이 머물던 행궁을 비롯해 군영과 관청, 장터 등이 그 안에 있었다.
남한산성 안에 있던 조선시대 감옥 등 관아 건물과 주요 시설의 구체적인 위치가 최근 학계의 연구로 파악돼 좀더 정확한 발굴과 복원을 할 수 있게 됐다. 한국건축역사학회(회장 김경표)는 남한산성의 지적(地籍) 변천사를 주제로 2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학술대회를 열어 그 내용을 발표한다. 고문헌과 고지도, 조선시대 토지대장인 양안뿐 아니라 1912년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도부터 토지조사부, 현재 지적도 등을 일일이 검토하고 대조해서 확인했다. 남한산성 내 주요 시설의 위치를 지적도를 동원해 파악하기는 처음이다.
특히 감옥과 군영인 수어영에 딸린 초관청, 악공청, 아병청,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 보관 창고인 별고의 위치는 그동안 짐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김기덕 중부대 강사가 발표할 논문 ‘남한산성 성곽시설과 관아의 지적 변화’에 따르면 감옥 자리는 지금의 남한산성 내 로터리 아래쪽 주차장이다. 초관청과 아병청, 악공청은 수어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행궁 주변에, 별고는 남한산성 종각 옆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1911년 토지조사부와 1912년 지적원도에 등록된 국유지, 광무 4년(1900)에 작성된 양안을 통해 각각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지번으로 표시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한 위치는 발굴을 해봐야 드러나겠지만, 일단 발굴 범위를 정하고 복원할 근거는 확보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남한산성은 1907년 일본군에 의해 모든 시설이 불타는 수난을 당했다. 해방 후에는 1973년 남한산성 한복판에 로터리가 생기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적상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광주유수부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것은 인조가 기존 산성의 개축을 마친 1626년이다. 그때부터 1917년 일제가 성내 광주군청을 경안면으로 옮길 때까지 230여년 간 남한산성은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남한산성처럼 산성 안에 도시가 형성된 예는 세계에 유례가 드물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잠정 목록 중 우선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2월 8일 문화재청)된 까닭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산성도시로서 남한산성의 가치를 재조명해 세계유산 목록에 올리기 위한 조사 연구의 하나로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마련했다. 성곽시설과 관아의 지적 변천을 다룬 김씨의 논문 외에 ‘조선 후기 국왕 행차와 남한산성’(김동욱 경기대 교수), ‘남한산성 신남성의 축성 의미’(백종오 충주대 교수), ‘남한산성 행궁과 사묘의 지적 변화’(이혜원 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 등 8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경기도는 2018년까지 3단계 정비계획에 따라 남한산성을 복원 중이다. 1단계(2010~2011)로 지난해 10월 행궁 복원을 마친 데 이어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인화관을 올해 안에 복원한다. 행궁복원은 발굴조사부터 치면 10년이 걸렸다. 10월경이면 행궁의 단청 작업까지 끝나 화사한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2단계(2012~2015)는 우실(사직단), 군포(순라꾼이 머물던 곳), 우물, 가마터를 발굴해 복원하고, 3단계(2016~2018)는 이아터(감영), 연무관, 관아거리와 외성 2.7Km를 복원한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올해 6월과 10월에도 국내 학술 세미나, 국제학술 세미나를 열어 남한산성의 가치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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