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자 4개 사니 7000원, 슬며시 되돌려 놓는 심정이란…"
22일 밤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 이모(33ㆍ여)씨는 '100g당 680원'가격표를 무심히 보고 제주산 감자 4개를 봉지에 담았다가, 저울에 찍힌 가격을 보고선 움찔할 수밖에 없었단다. 감자 4개 값이 무려 7,000원. 점원이 안 보는 새 슬며시 봉지를 매대 위에 두고 와 버렸다는 이씨는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가격표를 붙이고도 그냥 두고 간 봉지가 여기저기 널린 걸 보니 나만 비싸다고 느낀 건 아닌가 보다"고 말했다.
고물가는 칼만 들지 않았을 뿐, 강도나 다름없다. 물가가 10% 뛰면, 내 소득이 그냥 10%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소득강탈적' 고물가가 지금 서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 4%대. 이 자체도 선진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이지만, 유독 먹을거리 값은 더 뛴다. 지난달 신선식품 물가는 1년 전보다 30.2%나 올랐다. 공산품이야 안 사면 그만이지만 먹을거리는 그럴 수 없다는 점에서, 서민들은 지금의 고물가가 더 버거울 수 밖에 없다.
서민들을 옥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빚이다.
회사원 김정식(29ㆍ가명)씨에게도 빚은 청춘을 옥죄는 지긋지긋한 굴레다. 김씨가 빚에 코가 꿰인 건 2008년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부터. 몇 달 동안 급여를 못 받자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은행 신용대출은 언감생심이었다. 연리 28~34%의 캐피털 회사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결국 대부업체까지 떠밀린 김씨가 갚을 돈은 이제 3,000여만원. 한 달 원리금만 150만원이 넘는다. "답답할 뿐이다. 결혼 계획도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지금의 상황으론 사치다." 김씨의 넋두리다.
물가를 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지만, 빚 가진 서민에겐 오르는 금리 자체가 부담이다. 학자금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을 아직 갚지 못한 4년차 중소기업 회사원 박모(31)씨의 입장에선, 돈을 다 갚을 때까지는 돈을 벌어도 '나'를 위해 버는 게 아니다. 그는 "대출 금리가 최근 7.8%에서 8.2%로 올라 매달 더 들어갈 돈이 몇 만원은 될 것"이라며 "그러나 회사는 올해도 월급을 올려 줄 기색이 없어 보인다"고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물가도, 금리도 이게 바닥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정부의 인플레 억제 목표치 3%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황. 여기에 리비아발(發) 오일쇼크까지 엄습하고 있어, 인플레압력은 갈수록 고조되는 분위기다.
가계부채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유일하게 가계 빚을 늘려온 우리나라지만, 아직도 정부는 총부채상환비율(DTI)완화 등 부채를 늘리는 정책만 내놓고 있다. 그런데 작년 11월 이후 두 번이나 금리를 올린 한국은행은 이달 중 0.25%포인트 가량 추가인상을 검토 중이다. 이변이 없다면 연내 1%포인트까지 더 오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연쇄적으로 대출이자도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런 흐름이라면 또다시 연체자 양산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17일 신용회복위원회에서 만난 김명자(65ㆍ여ㆍ가명)씨는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낸 사연을 털어 놓았다. 화장터나 묘지 등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청소일을 하며 월 100만원 정도를 벌던 김씨는 지난해부터 무릎을 다쳐 일을 쉬고 있다. 일흔을 넘은 남편이 운전을 해서 버는 140만원이 수입의 전부. 김씨가 일을 멈추자 채무 1,500만원의 원리금과 월세 30만원을 댈 여력이 없었다. 김씨는 "평생 빚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이러고 있으니 그 답답함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김씨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더니, 작은 분식점을 낼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빚도 있는데 돈은 어떻게? "다행히 빌려주겠다는 지인이 있다"고 웃었다.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김씨는 "막내아들 결혼도 시키고 빚을 갚으려면 어쩔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평생을 빚에 시달린 김씨가 마지막으로 기대려 하는 곳은, 그 넌더리 나는 빚밖에 없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 만년적자 못 면하는 저소득층 가정
한 달에 112만 100원을 벌어들여 140만 3,400원을 쓴다. 정부나 친지, 지인 등에게서 받는 돈(35만 8,400원)을 합쳤는데도, 매달 28만3,300원이 적자다. 889만원의 빚이 쌓여 있지만 적자 가계부가 계속되는 한 갚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통계청의 2010년 가계금융조사와 4분기 가계동향에 나타난 소득하위 20% 가정(소득 1분위), 즉 저소득 서민가정의 평균적 모습이다. 소득 1분위 가구는 적자규모가 가처분소득의 28.1%에 달한다. 역시 서민이라 할 수 있는 하위 20~40%(2분위) 가정은 소폭의 흑자(16만 5,500원)는 내지만 저축은 엄두도 내기 힘들 정도로 빠듯한 규모다. 상위 20% 가정(5분위)이 695만 1,800원을 벌고 493만 1,900원을 지출해 매달 201만 9,900원을 남기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하위 20% 가정의 가계부를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소득이 3.2% 늘어나는데 그친 반면, 지출은 7.4%가 늘었다. 신선식품 가격 급등 여파로 식료품 지출이 12.7% 늘었고, 의류ㆍ신발 지출도 16% 늘었다. 의료ㆍ보건비가 10.1% 늘어난 반면 교육비(-1.8%)와 외식ㆍ숙박비(-1.8%)는 지출이 감소했다. 씀씀이를 늘려서가 아니라, 이게 다 물가상승 때문이다.
저소득층이 빚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가계살림이 만년 적자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득 증가 속도가 지출을 따라잡지 못해 적자 규모도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소득 하위 20% 가정 중 적자를 기록하는 비율은 58.6%. 전국가구 평균(27.3%)의 두 배다. 2분위 가정도 3분의 1이 적자를 기록한다. 결국 저소득층 가계에서는 적자→생활비 대출→연체→신용도 하락→금융비용 증가→가처분 소득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셈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 물가 해법은 없나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갈수록 늘어만 가는 서민 가계의 적자.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은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일단 두더지 잡기 식 가격 통제가 결코 근본적인 물가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결국은 구조적 해법이 필요한데, 우선 거시정책 차원에서 금리, 환율 등의 정책 조합을 적절히 활용할 것을 제언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환율 금리 등 거시정책수단을 배제한 채 행정력을 동원한 미시적인 해법만 동원해서는 뛰는 물가를 잡는 데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말했다.
특히 리비아 등 중동 및 북아프리카 사태가 악화되면서 갈수록 공급 측면의 물가상승 압력이 점점 거세지는 상황. 국제 원자재와 농축수산물 등의 원활한 수급을 위한 제도 개선, 그리고 에너지 저소비형 산업구조와 소비구조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전무는 "자원 선물 시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비축 제도를 확대해 안정적인 수급 조정이 이뤄져야 한다"며 "또 고유가 시대에만 반짝할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에너지 저소비 구조를 갖추려는 정부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통 및 물류체계의 합리적 개선도 중장기로 지속 추진돼야 할 과제다.
자금공급(저리대출확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서민금융 정책도 개선 필요성이 제기된다. 결국 이렇게 늘어난 빚이 서민 가계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전문가들은 서민들이 일으킨 빚이 실제 소득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대출과 소득의 연계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건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무작정 대출만 늘려주다 보면 저소득층의 빚만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온다"며 "창업지원이나 직업교육 등 소득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비금융지원과 금융지원을 연계해야 된다"고 말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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