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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굿바이 평양' 양영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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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굿바이 평양' 양영희 감독

입력
2011.02.2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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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양영희(47) 감독의 가족사는 유별나다. 제주도 출신인 아버지는 일제시절 오사카로 건너가 재일본조선총연합회(총련) 오사카지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70년 '귀국사업'(북송)으로 세 오빠 모두가 북한 평양에 정착했다. 가족이 모두 '조선'(북한) 국적인데 그의 국적만 한국이다. 총련 산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미국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위해 국적을 바꿨다. 그가 오사카에서 나고 자라 도쿄에서 사는데 친척 대부분은 평양과 원산, 신의주에 거주한다. 그에게 고향은 쉬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다.

양 감독은 2006년 자신의 예사롭지 않은 가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을 받았고, 이 영화의 국내 개봉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후 그는 '디어 평양'의 속편이라 할 '굿바이 평양'을 만들었다. 평양에 사는 조카 선화에 대한 애정과 함께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연민이 깃든 '굿바이 평양'은 3월3일 국내 극장가에 선보인다.

1981년 처음 평양을 방문한 그는 1995년부터 북한 가족들의 모습을 가정용 캠코더에 담았고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의 재료로 삼았다. 2005년을 마지막으로 그는 북한을 찾지 못하고 있다. 총련이 그의 방북을 불허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찬양은 하지 않고, 꺼내지 말았으면 하는 (북송)문제를 다룬 것"이 괘씸죄로 작용한 것이다.

양 감독은 "2008년 어머니와 함께 방북 신청을 했다가 나만 거부당했다. (영화 때문에) 이산의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북한에 가지 못했다. "평생을 바친 조직이 그런 (방북 불허) 판정을 내렸으니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땐 아들 손자 아무도 못 와 참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는 "처음 카메라를 들고 평양을 다녀온 이후 16년 동안 평양의 가족에게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매일 겁나고 매일 걱정이어서 많이 울고 술도 많이 마셨다"고도 했다. 그래도 그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현 체제를 그냥 따라가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난 그저 내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고 밝혔다. "방북을 막으면서 총련이 '디어 평양'에 대한 사과문을 쓰라고 하더군요. 사과문을 대신해 '굿바이 평양'을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평양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한 저의 러브레터입니다."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2000년대의 북한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고 말했다. "1980년대는 사람들이 웃음이 정말 많았고 사람들간 격차가 없었는데 2000년대 들어 완전히 시장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배급도 사라졌으니 국가만 믿고 기다리다간 죽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정치적으로 국가를 바꿔야겠다 보다 가족은 일단 살리자는 분위기입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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