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사(禪師)들의 삶과 수행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소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걸었다는 기록을 자주 접한다. 흔히 소 걸음이라고 하는 우보(牛步)는 수행자의 전형적인 걸음걸이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동작마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정밀하고도 정확한 집중과 관찰이 수반되어야 하는 '걷는 수행'이 빠른 걸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원의 스님들도 좌선을 할 때에는 집중수행을 하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는 생활에 지장이 없을 만큼 집중력을 완화하곤 한다. 깨어있는 동안 모든 시간과 행동을 할 때마다 수행의 집중력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후세에 모범이 되는 훌륭한 수행승들은 일상생활에도 상대적으로 깊은 집중력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소처럼 천천히 걷는 것이다.
큰스님들은 "수행자는 온전한 사람 구실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깨어있는 시간을 온통 수행으로 일관하려고 하면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바보 멍청이 취급을 받아도 마음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곤 하는 것이다.
우보 만리(牛步萬里)라는 말이 있다. 소 걸음으로 만 리 먼 길을 간다는 말이다. 빨리 뛰는 것은 짧은 거리를 갈 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조금 먼 거리를 뛰면 금방 지쳐버린다. 100m를 달리고 나면 다들 주저앉아 헐떡거리며 쉬어야 하지만, 10리 길을 걸은 사람은 그렇게 헐떡거리거나 지치지 않는다. 걸어서 여행을 하는 사람은 몇 달이나 몇 년의 긴 기간이라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뛰면서 긴 기간을 여행한 사람의 예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80년 세월을 길에서 사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은 '길'이라는 세계에서 '걸음'이라는 인생을 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길을 걸으며 여행을 하고, 인연과 순리의 가르침을 펴신 당신의 걸음걸음은 가장 대표적인 소 걸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몇 해 전의 보도에 의하면, 영국 과학자들은 세계 30여 개 도시를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서 현대인의 걸음 속도가 10년 전에 비해 10% 빨라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이런 결과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업무 중압감이 커지고 마음이 바빠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의 걸음은 빨라질 수가 없다. 수행자의 걸음이 느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생각들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우고 마음이 바쁜 사람은 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자신보다는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고, 우호와 협력보다는 경쟁과 승리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일상이 그래서 슬픈 것이다.
20여 년 산사의 수행자로 살아왔지만 아직 환경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 것을 느끼곤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산사의 흙을 밟고 돌을 디디는 발걸음은 늘 한가롭고 여유가 있다. 그러나 도시에 나와서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 휩쓸려가다가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질 만큼이나 빨라진 나의 걸음걸이를 발견하곤 한다. 순간 문득 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다. 시간이 등 뒤에서 소리치며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고 해서 특별한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이유도 없이 바빠진 마음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도시의 거리에서도 소처럼 느리게 뚜벅뚜벅 걸어야겠다.
주경 서산 부석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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