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문서 18만여쪽 공개"동북아 힘의 균형 위해 중국이 과장정보 흘려" 분석도日, DJ 내란음모 사건 때 北 끌어들여 한국 설득ㆍ회유
1979년 10ㆍ26 사태 당시 한반도 주변 4대국 중 미국, 일본,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부추겼고, 중국은 북한의 위협을 일부 과장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외교통상부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1970년대 말에서 80년까지의 외교문서 1,300여 권(18만여 쪽)을 20일 공개했다. 10ㆍ26 사태 및 5ㆍ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 반응을 보여주는 외교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다.
10ㆍ26 사태 직후인 79년 11월22일 주영 대사관은 영국 하원의원이 중국 수상 보좌관으로부터 "소련이 북한 남침을 종용하고 있고, 중국은 이를 제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는 전문을 보고했다. 같은 해 12월22일 주일 대사관은 "일본 외무성이 북한이 79년 말~80년 1월 남침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라고 타전했다. 이 외교 전문은 "미국은 이란 문제로, 중국은 베트남 문제로 손을 쓰기 어렵다"라는 국제 정세와 함께 "12ㆍ12 사태 이후 한국 군부 및 국론이 분열돼 있어 북한이 결정적인 남침의 적기로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분석을 전했다. 주일 대사관은 이듬해 이 정보가 과장된 것으로 평가받자 정보의 출처가 중국 측 인물이란 사실을 공개한 뒤 "중국이 이 첩보를 흘린 이유는 동북아에서 힘의 공백 상태를 경고해 미국의 군사적 보완조치를 촉구하려 한 것"이라고 자체 분석했다.
미국은 1980년 5ㆍ18 민주화 운동 당시 북한 도발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중국에 이를 억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 5월22일 에드먼드 머스키 미 국무장관은 차이 주미 중국대사를 불러 "북한이 정세를 오판하지 않도록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촉구하고,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조처할 것이며 소련에도 이런 방침을 전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김 전 대통령의 구명을 위해 국제사회가 분주히 움직인 사실도 공개됐다. 미 정부는 한미간 경제ㆍ군사 교류가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미 의회는 실제 사형이 집행되면 한미 관계가 파탄 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스즈키 젠코 일본 수상은 "김대중이 극형에 처해지면 대한 협력은 큰 제약을 받고, 일본에서 북한과 적극적 교류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질 수 있다"라며 이 문제에 북한을 끌어들였다.
80년 북한 노동당 제6차 전당대회 동향을 분석한 외교전문은 당시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과격하고 고집이 세며 모험주의적 성격의 소유자"라며 "두뇌가 명석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75년 월남 패망 후 5년여간 월맹군에 억류됐다 풀려나 '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86) 전 주월 대사관 경제공사의 옥중편지도 처음 공개됐다. 또 이 전 공사의 석방에 미국 등 우방국들은 소극적이었으나, 스웨덴이 전권을 위임받고 석방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정부가 68년부터 4년간 울릉도 남쪽 12해리 지역 수심 약 2,200m 지역에 약 45톤의 방사능 폐기물을 투기한 사실도 밝혀졌다.
또 우리 정부는 80년부터 냉각된 북중 관계와 대중국 외교ㆍ경제 접촉을 의식해 중국 호칭을 '중공'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부를 것을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우리나라를 70년대 '박정희 도당'에서 80년대에는 '남조선 당국'으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중공을 '중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8년 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부터다.
김성환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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