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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72> 강경애의 <두만강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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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72> 강경애의 <두만강 예찬>

입력
2011.02.2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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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소설가로 강경애는 두만강의 작가라 할 만하다. <두만강 예찬> 은 그미가 두만강에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 할 터이며, '간도(間島)'를 알아보려면 두만강부터 알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미의 지론이다.

"지금의 간도라면 왕칭(汪淸) 옌지(延吉) 허룽(和龍) 훈춘(琿春), 이 4현(四縣)을 말함이니, 이 넓은 지광(地廣ㆍ땅의 넓이)에 조선인이 40만이다. 이 40만은 누구나 두만강과 인연이 있을 것이다."(<두만강 예찬> , 《신동아》, 1934.7)

이렇듯이 이곳 간도에 모인 40만 조선 유랑민이 거의 모두 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정착한 길, 민족 대 이동의 젓 줄이 두만강이었다.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일천 오백여 리의 장강일 뿐 아니라, 간도 룽징춘(龍井村)으로 흐르는 해란강과 옌지강이 모두 두만강에서 합류하는 강들이다. 게다가 만주는 같은 민족 부여국이 개척했고,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동경(東京), 솔빈부(率濱府)가 모두 이 강 주변에 세워졌다.

특히 조선 세종(世宗) 임금은 김종서(金宗瑞ㆍ1390~1453)를 시켜 육진(六鎭)을 개척하게 했는데 이때 두만강으로 국경을 삼는 대역사를 이룩했다. 그리고 1860년대 이후 청나라가 이민실변(移民實邊)이라 하여, 두만강 주변 땅 주민을 이주 개발한다는 정책과 더불어 한인의 만주 이주는 어느 정도 자유이민, 정착이민으로 발전되어 갔다(金春善.金泰國; <조선후기 한인의 북방이주와 만주개척> 참조). 이것은 팽창하는 러시아의 위협도 감안한 정책이었다.

강경애는 여기서 두만강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삽입했다. 함경도 종성(鍾城) 대안(對岸) 두만강 가운데에 간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고 했다. 이 섬은 아주 비옥해서 곡식을 심으면 조선 땅보다 배나 소출이 많았다. 그러나 중국의 경비가 엄하여 마음대로 농사를 할 수 없자, 이 섬을 조선으로 옮기기로 하고, 밤새 물줄기를 중국 쪽으로 돌려 간도를 조선 땅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여기서 '간도농사'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했다. 두만강 개척사의 한 자취일 터이며, "두만강은 간도의 어머니"라고 한 말에서 이 두만강 예찬은 절정을 이룬다.

간도로 가기 전 조선일보에 투고한 단편 <파금> (1931)에서부터 만주에 관심했던 그미는 주인공이 만주로 이주하여 사상운동을 편다는 줄거리를 다루고, 이해 6월 간도로 가서는 1년 넘게 방랑하고 두만강을 건넌 회고기를 남겼다.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단편 <그 여자> 를 쓰고, <소금> <모자> <번뇌> <어둠> 과 마지막 작품 <검둥이> 까지, 만주 지방의 사회주의 운동이나 항일 유격대와 관련한 인물을 그렸다.(이상경; <강경애> , 65쪽 참조)

동해의 뱃길로 백두산을 찾자면, 러시아의 자루비노항과 중국의 훈춘과 북한의 삼각지대에서 동해로 흐르는 두만강과 만난다. 이곳에는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벌판에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은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와 두만강 가에 머물렀다는 안 의사의 초가집이 두만강을 굽어보고 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우던 소용돌이 속의 두만강은 이렇게 한민족의 개척과 투쟁의 역사를 머금고 한 여류 작가의 예찬 속에 지금도 흐른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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