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영업정지로 저축은행 업계의 썩은 부위는 대부분 도려냈다. 환부를 제거한 만큼, 정상적인 저축은행들에 대한 신뢰는 더 높아질 것이란 게 당국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는 매우 나쁜 선례를 남겼다. 부산ㆍ대전저축은행 영업정지 뒤 악착같이 예금을 찾겠다고 덤벼든 예금자들은 구제를 받았고, 정부나 저축은행측 말만 믿고 안일하게 대처했던 이들의 예금은 고스란히 묶인 것. 이 때문에 돈을 찾지 못하게 된 예금자들의 불만은 삼화나 부산ㆍ대전저축은행 때보다 이번 4개 저축은행 영업조치가 훨씬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같은 상황이 되풀이됐을 때, 금융당국의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자제 요청이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을 공산이 크다.
예고된 재앙
4개 저축은행 추가 영업정지는 충분히 예고된 것이었다. 금융당국이 지난 17일 부산 계열 5개 저축은행 가운데 부산과 대전 등 2개사만 영업정지 조치를 취했을 때, 금융권에선 "같은 계열사인데 나머지 3개 저축은행들이라고 과연 괜찮겠는가"란 걱정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부산 계열 쪽에서 "3개사는 유동성이 충분하니 버텨 보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당국도 이를 수용했다는 후문이다.
당국과 부산계열 측의 기대는 '어설프고 순진한 발상'이었음이 이내 확인되고 말았다. 자산 규모가 3조원이 넘는 부산2저축은행 해운대지점에는 예금을 찾으려는 수천 명의 인파들이 몰리면서 대기 번호표가 6,000번을 넘어섰을 정도. 중앙부산, 전주 등 다른 계열사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사정은 비슷했다. 충분하다던 유동성이 바닥을 드러내는 건 시간 문제. 17, 18일 이틀 간 이들 3개 저축은행에서 빠져나간 금액이 무려 4,000억원이 넘었다.
보해저축은행은 금융당국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5%에 미달하는 저축은행 5곳 중 1곳으로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됐다. "BIS비율 5%가 넘는 94곳 저축은행은 안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5% 미만 저축은행에 대한 고객들의 불안감은 더 확산되고 말았다. 보해저축은행에서도 이틀 간 400억원 넘는 자금이 빠져 나갔다.
뱅크런 조장 선례되나
금융당국도 이런 우려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런 점 때문에 당초 금융당국 내에서도 부산 계열 5곳 저축은행 모두를 영업정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발목을 잡은 것은 법 규정이었다.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14조는 '자금사정의 급격한 악화로 예금 등 채권의 지급이 어렵게 되어 예금자의 권익이나 신용질서를 해칠 것이 명백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영업정지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나머지 3곳 저축은행은 어느 정도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금 지급이 어렵게 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며 "강제로 영업정지를 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틀 앞을 내다보지 못한 금융당국의 근시안적 의사결정으로 인해 예금자들의 불신은 더 커지기 됐다. "더 이상 영업정지는 없다" "문제 없으니 안심해라"는 당국 또는 저축은행측의 설명만 믿고 기다렸다가 예금을 떼이게 된 만큼, 예금자들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너도나도 예금인출에 나서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저축은행 구조조정이 여기서 마무리돼 시장이 평온을 되찾는다 해도, 이번 케이스는 언제라도 예금자들의 불안을 촉발시킬 수 있는 나쁜 선례로 남을 것이란 평가다. 아울러 "당국이 금산법을 너무 책임회피식으로 해석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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