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혁명이 절반의 성공을 거둔 뒤 현재도 진행중인 이집트, 튀니지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의 원인들 가운데 공통점은 무엇일까. 오랜 독재에 지친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우선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정신의 자양분이지만 우리의 몸은 항상 먹을 것을 필요로 한다. 먹거리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거나 턱없이 비싸지면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은 금세 폭발성을 띤다. 이집트, 튀니지에서 반정부 시위의 방아쇠 역할을 한 것도 식량가격의 폭등이었다. 이후 생존권 확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함께 커져 가면서 마침내 독재자의 축출로 이어진 것이다. 실로‘식량의 정치학’ ‘식량의 혁명학’이라고 말 할만 하다. 현재 세계에선 최악의 상황으로 여겨졌던 2008년 보다도 더 심한 식량위기가 진행되고 있다. 한계선상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고 많은 국가들이 앞다퉈 식량비축에 나서고 있다. 세계 곡물시장에는 투기꾼까지 몰려 들어 식량위기를 극도로 혼미하게 몰아가고 있다.
먹을 것, 그리고 자유를 달라
지난달 25일부터 18일 동안 이어진 이집트 ‘로제타 혁명’도 식량문제가 주요도화선 중 하나였다. 이집트에선 ‘아이쉬’라 불리는 빵이 주식이다. 통밀 반죽을 화덕에서 납작하게 구워낸 이 빵으로 하루 세끼 끼니를 때운다. 아랍어로 아이쉬는 생명이라는 뜻일 정도로 이집트인들에겐 절대적 먹거리다.
역대 이집트 정부는 이런 이유로 빵 공급에 사회주의에 가까운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현재도 전체인구 8,000만명 가운데 1,420만명에게 빵 구입시 보조금을 준다. LA타임스는 “이집트에서 아이쉬는 통치자와 국민이 맺은 일종의 계약이다. 권력의 대가로 정부는 아이쉬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이집트에서는 이 계약이 파괴될 때마다 민중봉기가 일었다. 이번 로제타 혁명에서도 아이쉬는 시위대의 주된 요구였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매일 ‘아이쉬, 호레야(자유)’가 울려 퍼졌다. 세계 밀 가격이 50%나 급등하면서 이집트에서 아이쉬 공급이 부족해지자 민중은 극도로 예민해진 것이다. 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식량가격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는 촉매제일 수 있고, 특히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전했다.
식량문제의 폭발성
식량가격 폭등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세계 식량위기가 극심했던 2008년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일부 아시아 국가에 번졌던 소요와 폭동은 곡물가 상승에 따른 것이었다. 이번 이집트 시민혁명에 앞선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서도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의 폭등이 반정부 시위를 순식간에 확산시켰다. 위기를 느낀 중동지역 국가 등은 부랴부랴 식품가 안정에 부심하고 있다. 중동뿐만 아니라 2007년 한 차례 민중폭동이 있었던 멕시코에서도 올해 옥수수가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마자 정부가 주식인 토르티야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국제선물시장에서 옥수수 매입에 나섰다.
곡물은 가격탄성률이 높아 수요와 공급이 조금만 어긋나도 가격변동이 크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그 영향은 상대적으로 더 커진다. 국제식량기구에 따르면 지난달 세계 식품가격지수는 230.7을 기록, 세계적 식량위기가 가장 심했다는 2008년 6월(224) 상황을 넘어섰다. 매년 더 많은 식량을 필요로 하는 빈곤국과 개발도상국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야말로 사활적이다. 세계은행은 15일 “식량가격 폭등으로 지난해 6월 이후 저개발국가의 주민 4,400만명이 극도의 빈곤 상태로 빠져들었다”고 경고했다.
식량문제와 국가간 분쟁
국가체제 내부를 뒤흔드는 식량위기는 당연히 나라간 분쟁도 야기하는데 이는 이미 가시화했다. 곡물 주요 생산국이 수출을 중단, 상대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인접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상대국에 대해 양파와 토마토 수출을 중단,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세계 3위의 밀 생산국인 러시아는 지난해 가뭄으로 작황이 악화하자 아예 밀 수출을 중단해 버렸다. 중국은 옥수수 등 곡물 수입량을 급격히 확대, 곡물가 상승을 조장하는 바람에 세계 각국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잉여농산물이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인 미국도 이번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있다. 지난해 8월 미 연방준비제도가 “경기회복이 더디니 달러를 더 찍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곡물가 인상을 부추기기도 했다. 달러가치 하락으로 투자자들이 곡물 등 현물로 몰렸기 때문이다. 헤지펀드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신흥국들도 곡물 사재기를 하고 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 신흥국 식량 소비 급증… 투기자금이 위기 '부채질'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식량위기는 2008년 양상과 비슷하지만 원인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9일 보고서에서 "고유가가 식품가격 상승을 견인했던 2008년과 달리 이번 식량위기는 구조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분석했다.
당시에는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돌파해 곡물 경작에 필요한 비료값과 운송비를 끌어 올렸고, 이것이 식품가격 급등으로 이어졌다. 동남아시아 주요 쌀 생산국들은 국제 시장에 쌀을 풀지 않는 바람에 인근 국가들의 '기아 폭동'(hunger riots)을 유발했었다. 하지만 현재 유가는 100달러 안팎으로 낮지는 않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수급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에는 가격 상승의 1차적 원인은 수요가 급증한 탓이다. 특히 인도 러시아 중국 브라질 등 경제성장이 두드러진 신흥국들의 곡물 소비량이 늘면서 공급이 수요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중국만 해도 2006년 옥수수 소비량은 1억4,500만톤이었는데, 올해엔 12% 늘어난 1억6,200만톤으로 예상된다.
투기 자본이 옥수수, 콩, 밀 등 곡물을 먹잇감으로 삼은 것도 가격 상승을 유발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은 옥수수 등을 활용한 바이오 연료정책을 강화하는 추세다. 곡물이 주요 원자재로 분류되면서 투기자금 유입에 따른 가격 변동성이 한층 커진 것이다. 미국의 줄기찬 양적완화정책으로 유동성이 남아돌면서 가격 상승을 더욱 부채질했다.
세계 곡창지대를 강타한 홍수와 가뭄 등 기후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인 러시아 호주 브라질 등 주요 곡물 생산국들은 지난해부터 계속된 홍수 가뭄 화재 등으로 생산량이 뚝 떨어져 수출제한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미 외교협회(CFR) 로리 가렛 선임 연구원은 "많은 정부들이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식품가격을 낮추려 하지만 공급 부족으로 인한 가격 상승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식품가격 고공행진은 최소 수개월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WFP는 "2011년 곡물 생산량 규모가 예상치를 밑돌 경우 추가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나마 쌀 가격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올해 아프리카 국가들의 작황 사정이 양호한 점은 다행이다.
주요 20개국(G20)은 18일 재무장관 회의와 6월 농업장관 회의를 잇따라 열어 애그플레이션(농산물 인플레이션) 문제를 집중 논의하기로 했지만, 글로벌 식량위기의 파고를 넘을 특단의 대책이 도출될지는 미지수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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