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주의 반격 '1.9%'… 승부수인가 몸부림인가
경쟁만 없으면, 꽤 할 만한 게 장사다. 비슷비슷한 상품을 비슷비슷한 가격에 진열해 놓고 손님만 기다리면 그 뿐. 그러나 누군가 더 많은 손님을 받기 위해 가격을 낮추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영업은 피곤해진다.
잔잔하던 증권업계에 지금 평지풍파가 일고 있다. 자문형 랩어카운트(자문형랩) 수수료 전쟁. 별 경쟁 없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자문형랩 시장에, 마침내 가격(수수료) 인하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증권사들은 지금 오랜 평화를 깬 이 '가격파괴자'를 향해 눈을 흘기고 있다.
누굴까. 뜻밖에도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도 불리는 인물,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좀처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인물. 그런 그가 이달 초 기자들에게 모처럼 말문을 열었는데, 바로 자문형랩 수수료에 대한 것이었다.
"현재 투자금액의 3% 안팎을 받고 있는 자문형랩 수수료는 지나치게 높습니다. 현재 4% 수준인 금리와 비교하면 자문형랩 수수료는 비싼 편이고 그만큼 증권사들이 서비스를 잘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역시 박현주였다. 그의 발언 직후 미래에셋은 자문형랩 수수료 인하를 단행했고, 뒤이어 몇몇 증권사들도 속속 인하 대열에 합류했다. 금융빅뱅은 언제나 작은 수수료인하 경쟁에서 시작된 게 역사의 증명. 지금 시장에선 자칫 빅뱅의 전주곡이 될지도 모를 '박현주 신드롬'이 일고 있다.
승부수? 혹은 몸부림?
박 회장은 왜 하필 자문형랩 수수료인하 카드를 꺼내 든 것일까. '낮은 수수료'에 대한 소신? 새로운 분야에서도 승리를 쟁취하고 싶은 싸움닭 체질? 아님 또 다른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A증권사 관계자는 "애초 미래에셋이 자문형랩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펀드 환매에 대응하느라 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는데, 막상 자문형랩 시장이 예상외로 커지자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수수료인하 카드를 뽑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자문형랩 시장은 삼성증권의 압도적 우세 속에, 미래에셋은 한참 낮은 점유율로 4위에 머물러 있다.
박 회장은 실무진에게 파격인하를 주문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 실무라인에선 수수료를 연 3%에서 1.99%로 낮추는 안을 보고했지만 박 회장은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을 수준까지 더 낮추라"고 지시, 결국 1.9%로 최종 결론이 났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자문형랩 수수료 인하에 관한 한 박 회장의 스탠스는 공격적이란 얘기다.
하지만 이번 수수료 인하가 '박 회장이 코너에 몰려 있다는 방증'이란 해석도 나온다. 박 회장은 최근 미래에셋 펀드가 낮은 수익률에 환매 공세까지 받으면서 '펀드의 대명사'란 자존심이 크게 훼손된 상태. 이런 그에게 자문형랩 수수료 인하는 모처럼 찾아온 '반전카드'였다는 것이다.
신화의 연속
사실 박 회장에겐 보통의 증권맨들에게선 찾기 힘든 근성이 있다. 먼저 치고 나가는, 그리고 한번 물면 놓지 않는 파이터 체질. 도전의식일 수도 있고 '헝그리 정신'일 수도 있다.
출발부터 그랬다. 증권업계 최연소 지점장(옛 동원증권) 자리를 박차고, 그는 1998년 뮤추얼펀드에 뛰어 들었다. 더구나 자기 이름을 내건 '박현주펀드'란 상품으로. 아무리 증권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그라도, 실명금융상품을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각에선 "무모한 도전"이란 얘기도 있었지만, 결과는 대성공.
그 이후로도 가속페달의 연속이었다. 2003년 국내 첫 적립식 펀드('3억 만들기'시리즈)를 내놓은 데 이어 2005년엔 역시 첫 해외투자펀드를 출시했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적립식 펀드와 해외투자펀드 모두 박 회장의 특허품이나 다름없다"며 "어쨌든 우리나라 펀드투자의 역사는 이제 박 회장을 빼곤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궁지에 몰리다
미래에셋 창업 10년째인 2007년 박 회장은 회심의 역작을 내놓았다. 박 회장 특유의 시장을 꿰뚫는 통찰력(인사이트)과 미래에셋 브랜드를 내세운 '인사이트펀드'. 투자자들은 박현주 이름 석자만을 믿고 돈을 걸었다. 이 펀드상품에 가입하기 위해 금융기관 입구 밖까지 줄을 서는, 사상 초유의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융상품 가입을 위해 긴 행렬이 늘어서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천하의 박 회장도 '상투'를 잡았다. 펀드열풍 뒤에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재앙이었다. 13년전 외환위기는 분명 그에게 성공의 기회였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는 커다란 시련을 안겨줬다.
박 회장은 중국 시장을 낙관하며 '올인'했지만, 인사이트펀드는 첫 해부터 반토막이 나버렸다. 회복이 지연되면서 박 회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절대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2009년 이후 무려 20조원 넘는 자금이 미래에셋 펀드에서 떠나갔다. 언론에서든, 각종 행사에서든, 박 회장의 모습은 좀처럼 찾기 힘들어졌다.
이번 '자문형랩 수수료 인하'발언이 관심을 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3년간의 침묵 동안 그 역시 반격카드를 준비했을 터. 그렇기 때문에 '자문형랩 시장에서 뭔가 큰 싸움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싸움을 걸어온 박 회장에 대해 삼성 우리 등 랩시장의 선도증권사들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이미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맞대응한다면 그건 미래에셋 페이스에 말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승부는 지금부터다. 만약 돈이 미래에셋과 현대, SK증권 등 수수료를 인하한 업체로 몰리기 시작한다면, 대형 증권사들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곧 '빅뱅'의 서막이다. 반대로 투자자들이 수수료 인하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면, 미래에셋의 시도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빅뱅일까, 찻잔 속 태풍일까. 박 회장 역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릴 것이다. 자문형 랩 수수료전쟁의 결과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역시 박현주다'와 '박현주도 이젠…'으로 갈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 '맞춤복' 자문형랩, 너도나도 입는 '기성복'으로 "이젠 수수료 비쌀 이유가…"
기성복보다 맞춤복이 비싼 이유는 간단하다. 구매자들의 만족도가 맞춤복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맞춤복이 기성복보다도 맵시가 떨어지고 불편하다면, 맞춤복 가격은 이내 거품 혹은 폭리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자문형랩 수수료 논란도 그렇다. 통상 자문형랩은 맞춤복처럼 개인별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기성복과도 같은 일반 펀드보다 높은 수수료를 받는다. 하지만 실제 일반 펀드와 포트폴리오나 수익률에서 별 차이가 없다면, 자문형 랩 수수료는 '비싸다'는 지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주식형 펀드에서 고객들로부터 떼는 보수는 크게 ▦판매수수료 ▦판매보수 ▦운용보수 세 가지로 나뉜다. 판매수수료는 펀드에 가입 또는 환매할 때 증권사 등 판매사에 내는 일회성 비용이고 보수는 펀드 판매와 운용, 보관 등 처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투자자가 매년 펀드 순자산의 일정 부분을 지불하는 돈이다. 펀드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판매수수료는 1% 미만, 판매보수도 1% 미만, 운용 보수는 0.6~0.7%가 들어간다. 펀드 가입 첫 해에 들어가는 총 보수가 2.6~2.7%인 셈. 이후 가입 2년차부터 환매할 때까지는 판매수수료를 제외하고 1.6~1.7%만 내면 된다.
다소 복잡한 펀드와 달리 자문형랩의 수수료 구조는 단순하다. 증권사가 최대 연3.2%의 수수료를 떼가는 게 전부다. 이 안에 증권사가 자문사에 지급하는 비용(보통 8대2 구조)이 포함돼 있다. 증권사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가입금액(1억원이하~100억원 초과)별로 수수료율이 달라진다. 주식을 아무리 자주 사고 팔아도 매매수수료는 펀드와 달리 증권사가 부담한다.
본래 자문형랩은 높은 최저가입금액 등 장벽 때문에 소수 고액 자산가를 중심으로 판매돼 왔다. 그러다가 일부 자문사가 소수 우량주에 집중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일반 고객들까지 열풍에 가세하게 됐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 부작용으로 소액 투자자의 돈을 개별적으로 굴려주는데 한계가 생겨 여러 고객의 계좌를 비슷한 방식으로 굴리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 됐다"고 고백했다. 펀드와 비슷한 운용 방식이란 얘기다. 이는 수수료 논란의 핵심이기도 하다.
최근 '박현주발 수수료 인하 전쟁'에 현대증권과 SK증권까지 가세하면서 자문형랩 수수료 시장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경쟁이 격화될수록 고객입장에선 내야 할 비용이 줄어들어 좋은 일. 하지만 일부에선 "자칫 개별 맞춤서비스라는 본래 취지를 잃고 주식형 펀드의 복제품이 될 가능성도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강아름 기자 sara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